[조영미의 문화본색] 죽여주는 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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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부 기자

눈빛으로 말하는 배우가 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영화 '아무도 모른다'(2004)에서 '아키라'를 연기한 배우 야기라 유야가 그랬다. 집 나간 엄마를 대신해 세 동생을 거두는 10대 장남을 담담하지만, 어딘지 그늘진 눈빛으로 표현했다. 야기라 유야는 데뷔작인 이 영화로 57회 칸 영화제에서 남우주연상을 받았다.

야기라 유야의 눈빛에서 느꼈던 선연한 감정이 최근 다시 살아났다. 배우 윤여정이 이재용 감독의 영화 '죽여주는 여자'(2016)에서 연기한 '소영'을 통해서다. 지난달 초, 윤여정의 한국 배우 최초 아카데미상 여우조연상 수상 가능성이 커지면서 순전히 기사 준비를 위해 윤여정의 필모그래피를 훑다가 본 영화였다.

'죽여주는 여자' 속 소영은 서울 종로에서 성매매하는 노년 여성을 일컫는 소위 '박카스 할머니'다. 영화 제목은 이중적인 뜻을 담고 있다. 성 구매를 하는 노년 남성에게 성적으로 '죽여주는 여자'이자, 병이나 사별로 인해 삶의 의미를 잃은 남자들의 죽음을 도와주는 여성이라는 뜻이다.

소영은 결국 노년 남성을 죽인 혐의로 경찰에 잡히고 만다. 경찰차에 실려 체념한 듯 창밖을 바라보는 소영의 눈빛은 이 영화를 완성하는 결정적 장면이었다. 윤여정은 이 역할로 2017년 부일영화상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부일영화상 역사상 신인상, 조연상, 주연상을 받아 '트리플 크라운'을 처음으로 달성한 유일한 배우가 됐다.

고백하자면 '미나리'(2020) 이전까지 영화를 볼 때 윤여정의 연기를 눈여겨본 적은 없었다. 워낙 다양한 작품에 출연한 익숙한 배우이다 보니 연기 그 자체보다 스토리에 집중하며 작품 위주로 봤던 것 같다. 하지만 '미나리'와 '죽여주는 여자'를 보면서 배우가 해석한 인물을 설득력 있게 연기하는 것이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할리우드를 비롯한 세계 영화계가 그 본질을 알아봤다. 윤여정의 수상이 한국 영화의 성취가 아닌 윤여정의 성취라는 봉준호 감독의 말이 맞았다.

최근 뮤지컬 분야에서 경력이 20년 이상 된 배우 2명을 연속으로 인터뷰할 기회가 있었다. 똑같이 죽기 전에 꼭 해보고 싶은 역할이 있느냐는 질문을 던졌는데 2명 모두 1초의 고민도 없이 "전혀 없다"고 답했다. 결국 배우는 '선택하는' 직업이 아니라 '선택받는' 직업이라는 뜻으로 들렸다.

그렇다면 관객의 직업은 발견이다. 윤여정이 '죽여주는 여자'에서 인생 연기를 펼쳐 보였다고 생각한다. '미나리' 만으로 아쉬운 관객이 있다면 이번 주말 '죽여주는 여자'를 보기를 권한다. 그는 영화에서 정말 죽여준다. mia3@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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