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 즐거운 나의 집

부산닷컴 기사퍼가기

이소정 소설가

온라인 수업을 하는 아이 방에서 ‘즐거운 나의 집’ 이라는 노래가 흘러나온다. 가정의 달을 맞아 다 같이 불러보고 생각해보자는 음악 선생님의 목소리가 이어서 들린다. 아이의 나이에 내가 배웠던 노래를 시간을 뛰어넘어 아이가 똑같이 배우고 부른다. 즐거운 곳에서는 날 오라 하지만 내 쉴 곳은 작은 집, 내 집뿐이라는 가사는 여전히 작지만 소박하고 따뜻하다. 다른 점이 있다면 아이는 동영상을 보지만 그때 내 음악 선생님은 이 노래를 직접 피아노를 치며 가르쳐주셨다는 점이다.

96세로 요양원 들어가신 할머니
그 누구에게도 의지하지 않고 사셔
혼자의 세월 견디며 병고에 시달려
소 팔아 내게 피아노 사 주시기도
‘즐거운 나의 집’ 노랫소리 들으며
상념 속에서 할머니 사랑·삶 새겨

19세기 미국의 가곡을 부르며 아이는 집에 대해 무슨 생각을 할까. 나는 그때 무슨 생각을 했을까. 오 사랑, 나의 집을 부르며 어떤 설렘의 대상을 떠올렸을지도 모를 그날보다 지금 더 많은 생각이 드는 건 왜일까.

지난달 할머니는 요양원에 들어가셨다. 올해 구십육 세가 된 할머니는 직접 농사도 지으실 정도로 정정하시다 지난해 겨울부터 급격히 상태가 나빠지셨다. 거동이 불편해 누워서 지내는 날이 대부분이던 할머니는 요양원 가기를 끝까지 미루셨다. 마지막까지 혼자를 고집하셨다.

그 최후의 보루 같은 할머니의 혼자는 유서가 깊다. 할머니는 스물둘에 남편을 잃고 내 아버지와 유복자인 고모를 키우셨다. 그것도 잠시 자식들이 가정을 이루고 난 뒤부터 지금까지 다시 오십여 년을 오롯이 혼자 생활하셨다.

하지만 세월이 그런 할머니를 마냥 혼자 둔 것은 아니었다. 불같은 성정과 고집은 굳은살처럼 박혔다. 점점 더 많은 통증과 그것을 달랠 약들이 할머니를 따라다녔다. 그렇게 언제부턴가 할머니의 혼자는 오래된 툇마루처럼 뒤틀리며 자리 잡은 시간이었고 보수가 안 되는 낡음 같은 것이 돼 버렸다. 오래될수록 반질한 윤과 향이 나는 노년은 없는 것 같았다.

며칠 전에 본 영화 ‘노매드랜드’는 집을 떠나 혼자인 사람들의 이야기였다. 밴을 집처럼 삼아 떠도는 주인공 펀은 한시적인 일을 하며 자연 속에서의 삶을 선택한 사람이다. 마트에서 펀은 지인을 만나 함께 살 것을 권유받는다. 하지만 그녀는 거절한다. 그리고 예전에 자신이 가르쳤던 아이가 홈리스(homeless)냐고 묻자 이렇게 말한다.

“아니, 홈리스가 아니라 하우스리스(houseless)야.”

펀은 스스로 유목의 삶을 선택한 것이다. 물론 그 선택에는 남편의 죽음과 광산 도시의 몰락이라는 배경이 있지만 분명한 건 누구에게도 의지하지 않는 삶의 방식을 선택했다는 점이다.

할머니는 어느 쪽일까. 영화에서 펀은 자동차 수리비를 빌리기 위해 언니의 집을 찾아간다. 거기서 부동산에 대한 얘기를 나눈다. 빚을 내서 집을 사는 것이 펀은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사람들은 그런 펀을 불편해한다. 지난해 치솟는 부동산 가격을 보며 벼락거지가 된 기분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던 우리에게 선택의 기회가 남아있다면 어느 쪽을 택할까. 마지막까지 지키고 싶었던 할머니의 혼자는 내 손으로 화장실을 가고 밥을 끓여 먹는 존엄이었다,

남북전쟁 당시 북군과 남군 가릴 것 없이 모두 ‘즐거운 나의 집’을 불렀다고 한다. 전쟁이 빨리 끝나서 집에 돌아가고 싶은 한마음으로. 이제 할머니 집은 완전히 비어 있다. 할머니는 없고 집만 남아있다. 할머니는 내가 초등학교 이학년 때 키우던 소를 팔아 피아노를 사주셨다. 소 한 마리 값을 손녀에게 내주며 자신과는 다른 인생을 살게 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삶을. 나는 그 피아노로 분명 ‘즐거운 나의 집’도 쳤을 것이다. 피아노 소곡집 앞부분에 나오는 가장 손쉬운 노래였으니까.


당신을 위한 AI 추천 기사

    실시간 핫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