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 칼럼] 가상화폐, 외면이 능사는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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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열 경제부 금융팀장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그는 나에게로 와서/꽃이 되었다.’ 김춘수의 시(詩) ‘꽃’의 일부다. 김춘수의 꽃은, 꽃이라 이름 부를 때 비로소 꽃이 된다. 언어를 떠나서는 사물이 존재할 수 없다는 일종의 관념론적 세계관이 깊이 배어 있다. 얼마전 은성수 금융위원장의 발언에 불현듯 ‘꽃’을 떠올렸다.

지난달 국회 정무위원회 전체회의에 출석한 은 위원장은 가상화폐에 대해 “내재가치가 없는, 인정할 수 없는 화폐”라고 규정했다. 그리고 “(인정할 수 없기 때문에)사람들이 많이 투자한다고 보호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못박았다.

금융당국 “인정할 수 없다” 태도만으론
현재 뜨거운 투자 열풍 해법 될 순 없어
적극적으로 투자자 보호책 마련해야
여당의 관련법안 발의, 늦었지만 환영

가상화폐를 인정하지 않는 정부 입장은 새삼스럽지 않다. 하나 그것을 인정하지 않는다고 해서, 금융당국의 수장이라는 분이 시장상황을 방치하겠다는 식으로 엄포를 놓는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 아니다. 가상화폐 투자자들에게 “잘못된 길로 가면 어른들이 이야기를 해 줘야 한다”며 호되게 꾸짖었으니, 적어도 ‘방치’는 아니라고 애써 변명할 수도 있겠다.

최근의 가상화폐 투자를 지켜보면 이상 과열된 측면이 없지 않다. 그렇다고 가상화폐의 실체를 완전히 부정하기는 어렵다. 얼마전 미국 최대 가상화폐 거래소 중 하나가 뉴욕 증시에 입성했고, 세계 각국에선 가상화폐와 관련한 파생상품이 속속 출시되고 있다. 국내에선 4대 가상화폐 거래소의 거래 규모가 국내 유가증권 거래 규모를 웃돈다. 2월 기준 실명 인증 계좌만 250만 개에 달하며, 하루 거래량이 20조 원에 가깝다. 그럼에도 정부는 이런 현실에는 눈 감은 채 가상화폐 투자자 모두를 ‘허상을 좇는 철부지 투기꾼’으로 몰아갔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그는 다만/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정부)가 그것을 화폐 혹은 자산이라고 인정하기 전에는 그것은 다만 하나의 허상에 지나지 않는다. 실명 계좌가 250만 개든, 하루 거래량이 20조 원이든 내 알 바 아니다. 이 얼마나 완벽한 관념론적 세계관인가. 가상화폐만이 아니다. 현 정부가 들어서고 수년간 머릿속 관념(그들은 주로 ‘정의’라 부른다)을 위해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현실(시장상황)을 무시한 것이 어디 한두 번뿐이랴. 굳이 부동산 정책 등 다른 실례를 조목조목 들 필요까지도 없겠다.

내친김에 다른 작품 속에 언급된 ‘꽃’에 대해 조금만 더 이야기하겠다.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작품 속 줄리엣은 로미오에게 이렇게 물었다. ‘이름이란 뭐지? 장미꽃을 다른 이름으로 불러도 그 향기는 그대로인 걸.’ 사랑하는 사람을 단지 원수 가문의 이름으로만 판단하는 것에 대한 하소연이다. 김춘수의 꽃은 그 이름을 불러야 비로소 꽃이 되었지만, 줄리엣의 꽃은 그 이름이 무엇이든 꽃으로 존재한다. 전자의 꽃이 관념론적이라면 후자는 유물론적이다.

가상화폐 현상 역시 후자의 관점에서 바라봐야 한다. 정부가 인정하든 말든 이미 시장에서 엄연히 존재하는 현상이다. 물론 꽃의 종류에 따라 그 뿜는 냄새가 늘 향기롭기만 할 순 없다. 그러나 악취가 난다고 꽃의 존재 자체를 부정할 수도 없다. 가상화폐가 기존 경제 시스템에 선(善)한 작용을 할지, 혹은 그 반대일지 기자는 장담할 수 없다. 다만 한 가지만큼은 이야기할 수 있다. 가상화폐의 존재가 불편하다고 해서 그것을 부정하고 외면하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라는 점이다.

게다가 가상화폐 투자에 빠진 2030세대를 무턱대고 ‘어른으로서’ 꾸짖을 것이 아니라, 왜 그들이 가상화폐 투자에 몰릴 수밖에 없는지 그 배경부터 이해해야 한다. 근로소득의 상승률이 자산가치의 상승률을 결코 따라잡을 수 없는 현실 속에서, 이미 내집 마련이 하늘의 별 따기가 되어 버린 그들이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은 그리 많지 않다. 그들은 꾸짖어야 할 아랫사람이 아니라, 오히려 국가 시스템이 보호해야 할 시민들이다.

그런 의미에서 지난 7일 이용우 민주당 의원이 대표 발의한 ‘가상자산업법 제정안’은 늦게나마 반갑다. 이 의원은 “가상자산(가상화폐)을 명확하게 규정하고 이용자와 건전한 질서를 보호하기 위한 것”이라고 입법 취지를 밝혔다. 늦었지만 이제부터라도 제대로 된 논의를 시작해야 한다. 그 출발점이 가상화폐의 존재(그것이 선하든, 혹은 그렇지 않든)를 인정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겨우 한 걸음 앞으로 내디딘 셈이다. bell10@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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