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호 칼럼] 노인을 위한 나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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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석논설위원

제93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남우주연상과 각색상 2관왕을 차지한 영화 ‘더 파더’를 보고 나오는 길이었다. 치매에 걸린 아버지 앤서니를 자신의 집으로 모셔 와 돌보는 딸과 사위로 보이는(?) 남자가 주요 등장인물이었다. 아내가 그중 누구에게 공감이 되느냐고 물었다. 그걸 질문한 이유가 따로 있다. 현실 세계에서도 팔순이 넘은 아버지가 예쁜 치매를 앓는 어머니를 정성껏 돌보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 부부도 틈나는 대로 안부를 살피긴 한다.

아내는 내가 비슷한 처지인 딸에게 공감할 것으로 생각했다. 치매 환자 부양가족의 59.3%가 ‘치매 가족을 돌보는 것이 부담스럽다’고 대답한 2016년 보건복지부의 조사 결과도 있다. 최선을 다했지만 자기 인생도 있기에 아버지를 결국 요양병원에 맡긴 딸의 처지가 충분히 이해되었다. 그보다 자존심이 강한 치매 노인 앤서니에게 더 감정이입이 되었다. 나도 언젠가는 어머니나 앤서니처럼 시간과 기억이 헝클어지지 않을까 두렵다. 부모 한 명이 치매면 치매 발병 확률이 배 정도 높아진다고 한다.

노인 인구 10명 중 1명은 치매
2017년부터 국가책임제 시행

치매안심센터, 구심점 역할 미흡
부산엔 안심병원 하나도 없어

정부는 치매 책임 확실히 지고
우리 모두의 문제로 인식해야

우리나라 65세 이상 노인 인구 10명 중 1명은 치매를 앓고 있다. 2024년에는 치매 환자가 100만 명을 넘을 것이라고 한다. 2년 전 어머니가 다니던 치매안심센터에서 하는 프로그램에 보호자로 다녀왔을 때 생각이 난다. 치매안심센터에서 셔틀버스를 보내 줘 편하게 오갈 수 있어서 좋았다. 수업이 알차고 재밌었다. 어머니 옆자리에 앉아 같이 수업을 듣고, 파트너가 되어 손을 잡고 체조도 했다. 어머니와 보낸 그 시간이 오래 기억될 것 같다. 아버지도 한숨 돌리고 자기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문제는 치매안심센터 이용 가능 기간이 총 3개월에 불과하다는 점이다. 대기자가 많으니 중장기 이용은 불가능했다. 치매안심센터의 주 역할이 치매 조기 검진이라고 한다. 그래도, 아무리 치매 환자로 일찍 판명되어도 지속적인 치료관리로 이어지지 못하면 소용이 없지 않은가. 어머니는 그 뒤 민간이 운영하는 노인주간보호시설을 다니고 있다. 치매 환자와 가족은 여전히 각자도생하는 처지다. 치매안심센터가 치매에 대한 지역사회의 구심점이 되기에는 여러모로 미흡한 게 사실이다.

치매국가책임제는 문재인 정부의 대선 공약이자 국정과제로 2017년 9월부터 시행됐다. 치매안심센터는 치매국가책임제의 핵심 정책으로 전국에 256개가 만들어졌다. 문 대통령은 지난해 어버이날에도 SNS를 통해 ‘자식들의 몫을 다하는 효도하는 정부가 되겠습니다’라면서 치매국가책임제를 더욱 발전시키겠다는 의지를 밝혔다. 정부가 매달 약값 3만 원가량 지원하는 데 그친다는 비판도 있지만 건강보험 제도 개선을 통해 중증치매질환자의 의료비 부담 비율이 최대 60%에서 10%로 대폭 낮추어진 것도 사실이다. 코로나로 인해 지난해부터 치매 노인 복지서비스 운영도 어려움을 겪고 있다. 치매안심센터가 비대면 동영상 프로그램을 중심으로 운영한다니 치매 환자들과 소통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치매국가책임제의 또 다른 핵심 정책은 치매안심병원이다. 이 병원에서 이상행동증상이 심해 시설이나 가정에서 돌보기 어려운 중증환자를 치료받게 한다는 계획이었다. 벌써 4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지만 전국의 치매안심병원은 경북에 3곳, 대전에 1곳뿐이다. 노인 인구 비중이 높은 부산에 여태 치매안심병원 하나 없다는 건 말이 안 된다. 부산시는 2019년 5월에 ‘치매 자유 도시’를 추진한다고 선언했다. 2022년까지 공립형 치매 전담시설인 노인요양시설과 주야간보호시설을 구·군별로 1개 설치한다는 계획을 밝혔지만 감감무소식이다. 전임 시장의 정책이라도 꼭 필요한 일은 해야 한다.

내일이 어버이날이다. 어머니는 어버이날이란 사실도 금방 잊을 것이다. 치매안심센터의 어르신들은 오늘이 몇 년, 몇 월, 며칠인지 물으면 한결같이 대답을 주저했다. 영화 속 앤서니는 아끼는 손목시계에 집착하지만 늘 시계를 어디에 두었는지 기억하지 못했다. 소설과 영화 ‘은교’에는 미국 시인 시어도어 로스케가 쓴 인상적인 글이 나온다. “너희 젊음이 너희 노력으로 얻은 상이 아니듯, 내 늙음도 내 잘못으로 받은 벌이 아니다.”

지금도 가족 중에 치매 환자가 생기면 그 집은 풍비박산이 난다. 치매 가족 입장이 되니 치매에 대한 대통령의 각별한 관심이 고맙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치매 환자가 급증할 전망이라 여기서 머물러서는 안 된다. 대통령이 직접 치매국가책임제를 제시한 만큼 치매는 정치적이면서도 국가적인 문제가 되었다. 정부는 치매에 대한 책임을 확실하게 져서, 국민이 그 변화를 피부로 느낄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치매는 우리의 현재진행형 이야기다.

nleader@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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