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임과 작동’ 기다리는 ‘성찰과 나눔’의 확장 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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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달식의 공간 읽기] 암남동 알로이시오기지1968

변화는 혁신을 낳았다. 이건 단순히 리모델링 차원이 아니다. “완전히 다 바꾸었다”라고 해도 전혀 어색하지 않다. 그래서 전율이다.

학교 폐공간을 제대로 리모델링하면, 이렇게 놀랄만한 공간 변신도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것을 확연히 보여준 증거다. 이뿐만이 아니다. 학교 폐공간이 점점 늘고 있는 이 시대, 이것을 어떻게 활용할지 고민하는 이들에게 ‘죽비’를 내리친다. “이걸 한 번 봐, 학교가 가야 할 방향이 여기에 있어”라고.

바로 부산 서구 암남동 알로이시오기지1968의 기지#01과 02이다. 기지#01은 건물 면적이 3770㎡(1140평), 기지#02는 770㎡(230평) 규모다. 당초 이 자리는 알로이시오 전자기계고등학교 종합실습실과 본관 건물 자리였다(알로이시오 중학교 자리였던 기지#03은 아직 공간을 고치지 않아, 여기선 소개를 생략한다).

학교 폐공간 리모델링 기지#01·02 변신
구성 다양한 오감 충만 20여 개 방 꾸며
달빛 옥상·침묵의 방 등 체험 공간 풍성
방과 후 학습·지역민 평생 프로그램 운영

실습실 자리 기지#01은 그래도 건물 형체가 대부분 남아 있다. 하지만, 4층짜리 본관 건물이 있었던 기지#02는 건물 하부 1층만 놔두고 상부는 완전히 없앴다. 대신 한 켠에 새 건물이 들어섰다.

이를 수행한 건 (재)마리아수녀회가 운영하는 알로이시오 복지 시설인 ‘수국마을’(2014년 부산다운 건축상 금상)을 설계한 (주)건축사사무소 오퍼스(대표 우대성·조성기·김형종 건축사)였다. 우대성 건축사는 2011년부터 줄곧 마리아수녀회와 인연을 맺어왔다.

알로이시오 고등학교는 2018년 1월 폐교했다. 이 공간을 새롭게 활용하기 위한 고민은 폐교되기 훨씬 이전부터 시작됐다.

‘가난한 아이들의 어머니’ 마리아수녀회 수녀들은 우 건축사에게 특별히 주문한 건 없었다. 다만 기능이 소멸한 학교를 공간의 변화만이 아니라 ‘쓰임’과 ‘작동’을 기다리는 곳으로 바꿔 달라고 얘기했다. 우 건축사는 숙제를 찾기 위해 고민했다. 고민과 설계에 꼬박 7년이 걸렸다. 공사하는데 1년 6개월이 소요됐다.

이렇게 해서 세상 어디에 내놔도 부끄럽지 않은 공간, 기지#01, 02가 만들어졌다. 여기서 ‘기지’는 망망대해의 피난처이자 전진 기지처럼 버팀목 같은 장소라는 의미다. 이런 변화엔 부산시교육청의 지원이 큰 몫을 했다. 75억 원의 예산 지원이 밑거름됐다.

마리아수녀회 한 원로 수녀는 걱정을 많이 했다고 한다. 너무 화려할까 봐. 하지만 지금은 확 바뀐 기지에 만족해하고 있다. 기지를 보고 난 한 알로이시오 후원 기업인은 “이곳이 이렇게 바뀔 수 있단 말인가?”라며 감탄했다고 한다.

기지는 자기 자신을 찾는 것, 결과물을 다른 사람과 ‘더불어 나누는 것’을 기본 정신으로 한다.

실습실이었던 기지#01에서는 수많은 공간을 만난다. 그 공간에서 빵 굽는 냄새를 비롯해 오감(五感)이 살아 숨 쉰다. 4층까지 이어지는 방(공간)만해도 20개가 넘는다. 공간 구성도 모두 다르다.

기지#01에 들어서면, 프로그램 이수자는 ‘휠체어 체험’을 해야 한다. 휠체어로 경사로를 따라 기지를 한 바퀴 도는 체험이다. 이 체험을 하고 나면 기지 내 다양한 공간을 사용할 수 있는 ‘기지 사용권’을 준다. 물론 노약자를 위한 승강기도 설치돼 있다.

알로이시오기지1968 안승주 부기지장은 “‘더불어 함께’라는 이 공간의 기본 정신, 장애인은 우리가 더불어 살아야 할 이웃이라는 것을 몸으로 알기 위함”이라고 설명했다.

1층에 들어서면 빵 냄새가 방문자를 반긴다. ‘빵 굽는 수녀님’ 브랜드가 붙은 공간이 카페 바뇌와 함께 한다. 천장을 뚫어 만든 공연장인 ‘알로이시오 홀’은 놀라운 반전이다. 마치 건물 중정 느낌이랄까. “처음부터 있었어”라는 듯이, 빛의 변화를 읽은 공간 배치가 너무나 자연스럽다. 알로이시오 홀의 계단 의자는 아이들이 쓰던 체육관 목재 바닥을 재활용했다. 반대편엔 영상제작실, 다양한 것들을 만들어 볼 수 있는 ‘메이커스 랩’도 있다.

종전 실습실 중앙 복도는 완전히 사라지고 없다. 그곳엔 빨간 탄성고무가 깔린 경사로가 진작부터 있었다는 듯이 반긴다.

2층엔 웰컴 센터, 알로이시오 역사관, 사무실, 공방, 회의실, 뷰티 활동실 등이 배치돼 있다. 알로이시오 홀이 바로 보이는 웰컴 센터 앞에선 발 씻는 체험도 해 볼 수 있다. 발을 씻는다는 것은 정화의 의미이자 타인에 대한 고마움, 감사의 의미를 내포한다.

3층에는 독서실, 침묵의 방, 음악활동실, 사랑방, 생활공방도 만나볼 수 있다. 침묵의 방은 바쁜 일상을 살아가는 도시민에게 꼭 권하고 싶은 공간이다. 그저 멍 때리듯 있어도 된다. 온전히 침묵하는 공간, 그 속에서 자신을 되돌아본다. 이미 이곳은 방문객이 즐겨 찾는 공간이 됐다. 그 이유는 공간이 말해준다. 음악활동실 앞 테라스를 보면 웬만한 여름 더위도 잊고 지낼 듯하다. 중앙 경사로를 따라 이어진 아이들을 위한 ‘숨는 방’도 재미있다.

4층으로 가면 ‘수직농장’과 깔끔하게 정돈된 ‘모두의 부엌’을 만난다. 반대편엔 바비큐 파티도 하고, 빗소리를 들으며 낮잠도 자고, 달빛을 보며 밤하늘을 볼 수 있는 잔디 깔린 ‘달빛 옥상’이 반긴다. 기지#02쪽으로 난 계단을 몇 발짝 올라가면 라벤더, 박하, 페퍼민트, 장미 허브 등 수많은 식물과 채소, 꽃이 있는 ‘옥상 텃밭’이 보인다. 수직농장에서 키운 채소로 모두의 부엌에서 요리해 달빛 옥상에서 더불어 나눠 먹는다면…. 상상만 해도 설레는 일이다.

수많은 방들은 본래 이곳이 어떤 공간이었는지, 과거 이곳에 밀링 선반과 공작 기계가 가득했다는 걸, 도무지 상상하기 힘들게 한다. 내부 공간은 마치 예전부터 이렇게 쭉~ 있었다는 듯이 자연스럽다. 그만큼 변모는 상상을 초월한다.

기지#02는 종전 실습실-고등학교-중학교로 이어지는 사이 공간이다. 공간들이 쓰임으로 채워지면, 그것을 받쳐 줄 여백도 함께 필요하다. 기지#02는 바로 그런 역할이다. 기지#01의 2층은 기지#02로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공간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연결·확장되며 변화한다. 기지 속 작은 공간은 공간끼리, 기지#01은 02와 연결돼 확장하는 방식이다. 또 비워낸 공간은 일부러 여러 곳을 여백으로 남겼다. 채움이 아니라 채워 넣어야 할 공간으로, 소위 용도가 없는 공간이다.

기지#01과 02 사이엔 재미있는 나선 계단도 있다. 이걸 지나면 본래 이곳이 학교 본관 건물이 있었음을 일깨워주는 철골 기둥 8개를 만난다. 이게 없었다면, 이곳에 4층 건물이 있었음을 알기는 쉽지 않다.

이곳을 지나면 경북 안동의 병산서원이 연상되는 ‘대청마루’가 방문객을 맞는다. 도시의 번잡함에서 잠시 벗어나, 멍 때리듯 바다를 향해 한없는 시선을 보낸다. 빗소리, 바람 소리도 이곳엔 친구다. 이야기도 나누고, 공연도 하고, 영화도 볼 수 있게 돼 있다. 비어 있는 대청마루를 채우는 것은 사용자들이다.

대청마루 아래에 꽤 넓은 나무공방도 있다. 대청마루 앞은 주차장으로 쓰이던 아스팔트를 걷어 텃밭을 만들고 조각난 건물 바닥을 높여 잔디밭을 두었다. 우 건축사는 기지 내 공간 중 ‘침묵의 방’과 ‘대청마루’에 가장 공을 많이 들였다고 했다.

기지 곳곳엔 자연이 숨 쉰다. 콘크리트를 걷어내 텃밭을 만들고, 또 흙을 채우고 잔디를 깔았다. 기지엔 맨발로 움직여야 하는 공간이 많다. 온돌의 따뜻함과 목재의 신선함이 몸으로 느껴진다. 우 건축사는 “기지에 들어오면, 오감을 통해 우리의 잃어버린 감각을 되찾고, 조금이라도 자연의 변화를 느낄 수 있도록 했다”고 설명했다.

기지#01과 02는 올해 2월 정식으로 문을 열었다. 공간은 통합 방과 후 학습 프로그램, 기지 탐사, 지역 이웃과 함께하는 평생 프로그램, 자유학기제 활용 공간, 실업계 취업 사전 교육 공간 등으로 그 활용도를 점진적으로 넓혀갈 계획이다. 기지에서는 방과 후 학습 프로그램이 실행되고 있고, 목공, 요리, 제빵, 수경재배, 옥상 텃밭, 디지털 메이킹, 공예를 체험하는 공간에서는 삶의 기본기를 익히는 다양한 프로젝트가 진행되고 있다.

기지는 세상에 없던 프로그램을 다룬다. 가난한 이들이 진정 필요한 것 중에 국가나 다른 곳이 못하는 것을. 바뀐 공간은 이젠 설렘으로 다가온다. 공간을 이용하는 아이들의 해맑은 표정, 부산 시민과 지역 주민들의 웃는 모습이 상상되기 때문이다.

알로이시오(학교법인 소년의집학원) 설립자인 알로이시오(Aloysius Schwartz·1930~1992) 신부는 이렇게 말했다. ”가장 가난한 아이들에게, 가장 최고로 대접해 주라”고. 기지#01과 02는 그 실천이다. 정달식 선임기자 dosol@

공동 기획: 부산일보사·부산광역시건축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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