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른말 광] 905. ‘시락국’도 먹고 싶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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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원 교열부장

‘얼마 전 지방에서 열리는 강연에 초대받았는데 행선지를 혼동하여 어려움을 겪은 적이 있다.’

어느 신문 칼럼 구절이다. ‘얼마 전’과 ‘겪은 적이 있다가 충돌해 살짝 어색한 ’이 문장 속에는 두 가지 정보가 더 있다. 글쓴이가 서울에 산다는 것. 서울 밖 다른 ‘지역’은 모두 ‘지방’으로 불러도 된다는 것. 아, 하나 더 있다. 서울에서 ‘지방’을 보는 시선은 올려다보거나 마주 보는 게 아니라, 내려다본다는 것.

평등하게 마주 보는 시선이 아니라는 증거는 우리말에 ‘상경하다’ ‘서울로 올라가다’로 남아 있다. 이러니 인구가 수백만 명인 부산·대구에 가는 것도 ‘내려가다’가 될 뿐만 아니라 ‘시골’에 가는 일이 되고 만다. 아니면, ‘촌’에 가는 일이거나…. 이런 시선은 우리말에서 ‘촌스럽다, 촌티, 촌구석, 촌놈, 촌닭, 촌사람, 촌뜨기, 촌영감, 시골티, 시골뜨기, 시골스럽다’ 따위로 표현된다.

서울 중심 사고는 수백 년간 이어진 중앙집권 체제 때문에 뿌리가 깊어 없애기도 쉽지 않다. 그 때문에 수도 이전도 좌절됐을 터. 게다가 제도, 특히 법률마저 저런 생각을 조장하는 판이다.

2019년 4월 30일 부산녹색당이 기자회견을 열어 “기득권 정당들이 서울 중심적이고, 시민의 정치적 기본권을 제한한 법 조항을 방치한 데 대해 헌법소원을 제기했다”고 밝혔다. 녹색당은 이날 ‘정당은 수도에 소재하는 중앙당과 시·도에 소재하는 시·도당으로 구성한다’고 규정한 정당법 3조와 인구 규모와 관계없이 당원 1000명을 모아야 시·도당을 창당할 수 있도록 한 정당법 18조가 위헌이라며 헌법소원을 냈다.

법률에마저 ‘중앙당을 서울에 둬야 한다’고 돼 있는 것. 이게 지방을 대하는 보편적 태도라 해도 될 정도다. 하지만 K팝이, 한국 영화와 드라마가, K방역이 세계 최고의 자리를 넘보는 데서 보듯이, 세상은 급변하는 중이다. 이런 판국에 중앙집권적이고 서울 중심적인 사고는 대한민국의 발목을 잡는 걸림돌일 뿐. 함께 가야 멀리 간다지 않던가. 그러니 서울말 중심인 우리 표준어 정책도 각 지역 말을 방언(사투리)이라며 배척할 게 아니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재정비가 시급하다.

경남 통영 서호시장에 가면 명물 음식이 있다. 바로 ‘시락국’이다. 아니, 이곳뿐만 아니라 부산이나 경남·북 어디를 가도, 혹은 충청도에 가도 ‘시락국’을 먹을 수 있다. 아예 가게 이름을 ‘○○시락국’이라 붙인 곳도 적지 않다. 한데, 개방형 국어사전 <우리말샘>에는 이 시락국이 ‘‘시래깃국’의 방언’으로 나온다. ‘시락국’집에서 ‘시래깃국’을 먹어야 하는 현실이, 인식이 바뀌지 않는 한 균형 발전도 공염불일 터. 해서, ‘시래깃국’을 먹을 땐 서울이 흡사 발이 다 잘린 문어 대가리 같다는 생각을 자꾸만 하게 된다. jinwoni@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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