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을 여는 시] 벚꽃 십 리 / 손 음(19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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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 리에 걸쳐

뱀 한 마리가 길을 간다

희고 차가운 벚꽃의 불길이 따라간다

내가 얼마나 어두운지

내가 얼마나 더러운지 보여 주려고

저 벚꽃 피었다

저 벚꽃 논다

환한 벚꽃의 어둠

벚꽃의 독설

내가 얼마나 뜨거운지

내가 얼마나 불온한지 보여 주려고

저 벚꽃 진다


시집 (2021) 중에서


벚꽃 구경을 가고 싶은 충동은 욕망의 발현이다. 무의식인 욕망은 상상계에 속하지만 벚꽃 핀 거리를 뱀에 비유한 것은 상징계이다. 이러한 벚꽃을 뱀에 비유하고 인간의 불온함을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실재계이다. 실재계는 항상 부정적인 형태로만 경험되는 존재의 핵이지만 상징계가 있어야 가능하다. 피어서 불온함을 보여주던 벚꽃은 이내 지고 만다. 그래서 벚꽃이 함박눈처럼 쏟아지며 지는 거리에는 실재계인 존재의 울컥함이 있다. 도덕과 향락이 같은 뿌리에서 출발하듯이 죽음과 삶도 같은 실재계이다. 언어와 문자를 통해 시인은 끊임없이 존재의 불온함을 이야기하지만 존재의 불온함도 삶이 언젠가는 끝나기 때문에 가능하다. 봄은 우리에게 충동과 우울함을 동시에 주지만 이 봄도 곧 끝날 것이다. 그리고 다시 또 올 것이다. 이규열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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