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철의 인사이트] 20대 정치 컨슈머 시대의 도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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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위원

90년대 중반 이후 태어난 현재의 20대는 주체성이 강한 컨슈머(Consumer·소비자)다. 자신의 돈을 어떻게 사용할지 명확히 알고 합리적으로 구매한다. 586세대 부모들에게는 ‘무분별한 사치’로 비치기도 하지만, 20대는 브랜드 가치를 꼼꼼하게 따져 본 뒤 명품에 지르기도 한다. 제휴 카드 혜택과 할인 쿠폰, 프로모션은 기본, 온라인 최저가 검색은 필수다. 자기표현에 적극적이고 공정성 문제에 민감한 20대는 이념을 초월해 실용성을 추구하는 경향이다. 스마트폰을 손에 쥐고 태어나 ‘디지털 네이티브’인 이들은 광화문광장, 서면로터리가 아니라 SNS로 뭉친다. 20대는 과장되거나 형편없는 제품과 서비스에 ‘분노’를 느끼며, 반품하고, 항의하고, 댓글을 달고, 불매운동을 조직한다.

20대의 소비 패턴이 세상을 바꿀 태세다. 첫 대상은 이커머스다. 온라인 구매를 결정할 최초 단계부터 ‘반품’은 핵심 요소다. 온라인쇼핑몰은 식품도 ‘맛이 없다’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무료 반품해 주는 경우가 늘고 있다. 20대 소비자들은 ‘편의점 알바로 어렵게 번 내 돈을 브랜드를 믿고 지불했으니, 상품에 대해 책임을 져라’고 당당히 요구한다. 기업은 ‘소비자 불만’이 보이콧으로 치달을 수 있어서 촉각을 곤두세운다.

SNS 무장, 공정성에 민감한 소비자
형편없는 제품에 ‘보이콧’도 불사

정책에 문제 있으면 투표로 반품
정치적 소비자 운동, 세상 바꾸는 힘

20대가 처한 문제 한국 사회 축소판
허울뿐 마케팅 대신 좋은 정책이 핵심


이런 변화가 한국 정치판을 흔들고 있다. 20대는 SNS로 무장해 정치 상품을 소비한다. ‘정당과 정치인’ 브랜드가 판매하는 ‘정책과 도덕성’ 상품에 작은 문제라도 있으면 분노하고, 댓글을 달고, 곧바로 반품한다. 강준만 전북대 신문방송학과 교수는 저서 <쇼핑은 투표보다 중요하다>에서 “정치와 무관한 것으로 간주한 쇼핑 행위가 정치적 행동주의의 유력한 수단으로 떠오르고 있다. 유권자가 투표하듯 소비자가 시장에서 특정한 목적을 갖고 구매력으로 투표한다”고 지적했다. 정치가 불신과 혐오의 대상이 된 가운데 정치적 소비자 운동이 세상을 바꾸는 데에 큰 힘을 발휘할 수 있다는 뜻이다.

‘투표라는 소비로 세상을 바꾼다’는 강 교수의 말처럼 독일 사회학자 볼프강 울리히의 <모든 것은 소비다>라는 책 제목도 울림이 있다. “소비자도 스마트해졌다. 브랜드가 지어내는 유혹의 멜로디는 감미로워졌지만, 스마트폰으로 연결된 소비자들은 그 유혹에 자신을 내맡겨 상품에 수동적으로 좌지우지되지 않고, 개별적으로 집단적으로 유혹에 대응한다”라고 한 사회학자가 추천사에 쓸 정도이다.

20대 남성이 국민의 힘에 몰표를 던진 4·7 재·보궐선거는 ‘불량 정치 상품’을 반품하는 ‘정치 컨슈머 시대’를 열었다. 20대 표심의 원인에 대한 KBS 설문조사 결과 남녀 응답자의 27.3%가 여권의 ‘내로남불’ 행태에 실망했다고 답했다. 주거 안정과 일자리 정책 실패도 주요 원인으로 꼽혔다. ‘모든 것이 소비’인 시대에 20대 정치 컨슈머들은 ‘공정과 경제’란 구매 기준이 무너진 ‘정권과 정치’ 상품을 반품 조치한 것이다. 소비자행동론 전문가인 폴 패터슨 호주 뉴사우스웨일스대학(UNSW) 교수는 “소비자 분노는 일순간의 강렬한 경험 때문이 아니라, 지속적이고 반복적인 사건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라면서 “소비자 분노가 폭발한 다음에는 고위 간부가 직접 나서서 감정적 치유를 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하지만, 현 정권에서 그런 낌새조차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인지 문재인 대통령의 국정 수행 지지율도 20대에서 26.9%로 60대(26.2%), 70대 이상(27.9%)과 비슷한 형태를 보였다.

내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유권자의 18%를 차지하는 20대가 ‘캐스팅 보트’로 주목받고 있다. 보궐선거에서 재미를 본 야당 국민의힘은 20대가 ‘보수화’하고 있다며 환호작약하고 있다. 조바심 난 민주당은 엉뚱한 정책 개발에 바쁘다. 20대의 상황과 고민을 모르고 하는 행동이다. 그들은 산업화를 이룬 할아버지, 6·10 항쟁의 민주화를 이룬 부모와 정서적 공감대가 없는 새로운 세대다. 20대에 정체성 딱지를 붙이고, 남녀로 편을 가르고, 남초 카페를 두리번거리는 그 시간에 그들이 처한 상황의 본질을 해결하는 데 집중해야 한다. 20대의 문제가 한국 사회의 축소판이기 때문이다.

정치 소비 트렌드 변화는 어떤 정당이든 한번은 ‘구매’될 수 있어도, 한순간 반품 당할 수 있다는 냉정한 현실을 보여 준다. 이런 사실은 20대 남성이 2016년 총선부터 2021년 재·보선까지 싫은 정당을 안 찍은 결과 진보·보수를 오락가락하는 투표율에서도 입증되고 있다. 고무적인 것은 코로나 사태 이후 50~60대도 온라인쇼핑에 진입하면서, 반품 문화에 익숙해지는 현실이다. 20대처럼 점점 똑똑한 ‘정치 소비자’가 될 조짐이다. 좋은 정치는 허울뿐인 마케팅이 아니라, 제대로 된 일자리와 주거 안정 정책, 염치, 공정이라는 ‘킬러 콘텐츠’에서 출발한다. 정치를 올바로 소비하는 시대가 오고 있다. peter@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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