흙길 밟으며 숲에 취한 어느 봄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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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 경남수목원

젊은 부부가 차에서 내린다. 이제 겨우 너덧 살 정도 돼 보이는 쌍둥이도 보인다. 아빠는 짐칸에서 소풍 바구니와 파란 돗자리를 꺼낸다. 맑고 따뜻한 봄을 맞아 하루 나들이를 나온 모양이다. 오랜만에 바깥 구경을 하는 것인지 두 아이의 눈에는 신나는 표정이 역력하다. 경남수목원의 봄날 하루는 다정한 가족의 웃음소리로 시작한다.

30만 평에 걸친 자연생태체험장
느긋한 산책부터 본격 트레킹까지
2~6시간 걷는 맞춤형 4가지 코스
약용·난대식물원·선인장원 등도


■다양한 코스 즐기기

경남수목원은 경남 진주시 이반성면 대천리에 자리 잡은 자연생태 종합 학습체험장이다. 총 면적이 102ha(약 30만 평)에 이를 정도로 넓은 곳이다. 느긋하게 산책하면서 깨끗한 공기를 즐기기에 적당한 장소다.

이곳을 즐기는 코스는 크게 네 가지다. 먼저 어린 자녀와 휴식을 원하는 가족은 잔디원으로 직행해서 돗자리를 펼치면 된다. 산책 삼아 느긋하게 서너 시간 걸으면서 풍경도 즐기려는 사람은 산림박물관~선인장원~유아숲체험원~야생동물관찰원~전망대~민속식물원을 거치는 코스를 선택하면 된다. 좀 더 짧게 두어 시간 코스를 원하는 사람은 야생동물관찰원에서 전망대로 가지 말고 선인장원을 거쳐 바로 내려오면 된다. 아예 트레킹으로 대여섯 시간 걷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전망대에서 돌아오지 말고 양전마을 쪽을 거쳐 등산로를 한 바퀴 돌 수도 있다.

나무로 짜 만든 독특한 입구를 가진 산림박물관을 간단하게 둘러본 뒤 본격적으로 수목원 산책을 시작한다. 박물관 맞은편에 있는 약용식물원이 첫 목적지다. 도라지, 만병초, 천문동 등 130여 종의 식물을 관찰하면서 힐링을 즐기는 공간이다. 하얀 작약꽃이 나그네를 반기는가 싶더니 백두옹이라는 특이한 꽃이 바람에 맞춰 손을 살랑거린다.

민속식물원 한쪽 구석에 특이한 안내판이 보인다. ‘꽃과 나무의 품격-화목 9등품제’라는 제목을 달고 있다. 옛 선비들은 꽃과 나무를 품격, 운치에 따라 아홉 등급으로 나눴다는 것이다. 1등급은 뛰어난 운치를 가진 매화, 국화, 연꽃, 대나무다. 2등급은 부귀를 상징하는 모란, 작약, 영산홍, 석류나무다. 마지막 9등급은 나름대로 특색을 가졌다는 해바라기, 창포, 회양목이다.

민속식물원 뒤에 커다란 메타세쿼이아 나무로 이뤄진 숲 산책로가 만들어져 있다. 잎은 아직 다 여물지 않은 연두색이어서 신선하고 귀엽다. 두 줄 또는 세 줄로 구성된 산책로 한쪽에는 가족끼리 앉아서 쉴 수 있는 정자 여러 개가 만들어져 있다.

밝은 햇살이 옅은 잎 사이를 비집고 들어오는 덕분에 숲은 어둡지 않고 기분 좋을 정도로 환하다. 잠시 정자에 앉아 고개를 드니 푸른 하늘이 눈을 시리게 만들고, 상큼한 숲 향기가 코를 신선하게 간질인다.

암석원을 지나 산림박물관 맞은편에 있는 돔 모양 열대식물원 쪽으로 천천히 걸어간다. 아쉽게도 산림박물관을 제외한 나머지 실내공간은 코로나19 탓에 모두 문을 닫았다.

열대식물원 뒤쪽 작은 공간에 주홍색 꽃이 활짝 피어 있다. 진달래나 철쭉 색을 쏙 빼 닮은 꽃잔디다. 그 옆에는 분홍색 꽃이 달린 루브라꽃산딸나무가 꽃잔디에게 그늘을 드리우고 있다. 끝부분 산책로 모퉁이에서는 둥글게 잘 다듬은 철쭉이 산딸나무와 꽃잔디의 다정한 대화를 부러운 듯 바라보고 있다. 잔디밭 위쪽 언덕 양지바른 곳에는 하얀 조팝나무꽃이 환하게 웃고 있다.



■한가로운 봄날의 추억

난대식물원, 무늬원, 선인장원을 두루 거치면서 상큼한 숲의 향기를 마음껏 마셔본다. 독특하게 생긴 커다란 꽃이 보인다. 네이버로 사진을 찍어 검색해보니 산철쭉(개꽃)이라는 이름이 나온다. 아주 화려하게 생긴 모양새만 보면 철쭉이라고 생각하기 어렵다.

문이 닫힌 야생동물관찰원에서 아쉽게 발걸음을 돌려 분수대로 내려가는 길 화원에 예쁘게 자리 잡은 꽃이 보인다. 튤립이다. 빨갛게 잘 익은 꽃이 지나는 산책객을 은근히 유혹한다. 튤립의 꽃말은 사랑의 고백, 매혹, 영원한 사랑이다. 연인들이 애정을 나누기에 가장 좋은 단어들이다.

분수대를 내려가자 너른 잔디밭이 펼쳐진다. 어린이 정원이다. 입구에서 만난 젊은 부부 가족이 잔디밭 나무 그늘 아래 덱에 자리를 깔고 앉았다. 두 아이는 따스하고 화사한 햇살을 마음껏 즐기며 푸른 잔디에서 뛰어놀고 있다.

잔디밭 한쪽에는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긴 메타세쿼이아 숲길이 이어져 있다. 숲길 곳곳에 설치된 벤치에 사람들이 앉아 느긋하게 봄날 오후의 한가로움을 만끽하고 있다. 바쁠 게 전혀 없는 봄바람이 사람들 사이를 오가며 겨드랑이를 간질인다.

잔디밭 맞은편 수종식별원 뒤편에는 메타세쿼이아와 낙우송 숲길이 만들어져 있다. 잔디밭 쪽 숲길이 밝고 화사한 분위기를 안고 있다면, 이곳은 마치 태곳적 원시림 같은 느낌을 풍긴다. 흙길을 밟으며 숲 산책로를 천천히 걷는 기분이 꽤 이색적이다. 산책로 바깥은 진마대로다. 차들이 쌩쌩 달리고 있지만 큰 나무들이 소음을 막아주고 있어 시끄럽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숲 산책로를 지나 철쭉원과 수생식물원 일대를 걷는다. 이곳에는 여러 해 동안 떨어지고 쌓이고 또 떨어진 갈색 낙엽이 수북하다. 바닥만 쳐다보고 있으면 지금이 봄인지 가을인지 구별할 수 없다. 덱에 올라 식물원 앞의 조그마한 연못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연두색 나뭇잎이 달린 나뭇가지와 푸른 하늘이 연못에 담겨 있다.

글·사진=남태우 기자 leo@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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