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물썰물] 성파 스님과 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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옻칠은 수천 년 동안 인류가 사용한 가장 오래된 천연 도료 중 하나다. 옻[漆]은 오래전부터 옻칠 흔적이 남아 있을 정도로, 우리 민족과 함께해 왔다. 옻칠이 확인된 여수 적량동 비파형 동검(청동기시대)이나 아름다운 흑칠기인 창원 다호리 유적의 굽다리접시, 광주 신창동 칠기류(이상 철기시대) 등은 옻이 우리와 함께한 흔적들이다. 옻칠 문화는 죽 이어져 고려·조선 시대로 내려왔다. 특히 고려와 조선에서 꽃 피운 나전칠기는 우리의 대표적인 기술로, 그 정교함에 중국인들도 탐내고 극찬했을 정도였다.

옻은 매우 쓸모가 많다. 어떤 물건에 옻을 발라 건조하면 매우 단단해지고 방수, 방부, 방습 효과도 좋다. 또 윤기와 광택을 내 아름답게 한다. 그래서 오랜 전통을 이어 오며 만들어진 옻칠 공예품은 습기와 벌레, 열에 대단히 강하다.

영축총림 통도사 방장 성파 스님이 머무는 서운암에는 늘 옻 작업하는 사람들로 붐빈다. 지난해 스님은 서운암 옻 작업장 앞 물이 반쯤 잠긴 물통에다 그림 몇 점을 넣었다. 캔버스 표면에 옻이 칠해진 스님의 회화 작품이었다. 스님은 옻의 방수 효과를 직접 눈으로 보여 주기 위해서라고 했다. 방문객들은 이것을 신기하게 보곤 했다. 또 옻 작업장 앞에는 여러 번 옻칠한 삼베를 겹으로 붙여서 만든 기둥도 있었다. 스님은 “이걸 수 겹 더 옻칠하면 강도가 점점 높아진다”면서 “건축재료로도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고 말하곤 했다.

성파 스님은 옻칠을 예술로 승화시켰다. 지난해에는 통도사 성보박물관에서 ‘옻칠 민화 특별전’을 갖고 옻칠 예술의 진수를 보여 주었다. 옻칠이라면 흔히 검은 색상의 자개나 나전칠기 작품을 떠올리지만, 스님의 작품을 보면 이런 통념은 깨져 버린다. 옻나무 수액에 천연 색을 가미한 환상적인 색감에 전율하게 된다. 이렇게 늘 스님 곁엔 기묘하고 화려한 옻의 세계가 펼쳐진다.

지난 24일부터는 통도사 서운암 장경각 앞마당에 꼬박 3년을 작업해 만든 실물 크기의 울주 반구대 암각화와 천전리 각석을 옻칠로 되살린 작품이 물속에 전시돼 관객을 맞고 있다. 세계적으로도 거의 유례가 없는 수중 회화전이다. 두 작품은 우리 고유의 나전칠기 기법에 천연 옻칠로 색을 입혔다.

안주하지 않고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연구하는 성파 스님의 실험 정신이 또 한 번 빛난다. 옻을 활용한 스님의 실험정신과 예술. 과연 어디까지 이어질지…. 스님의 행적이 경이롭다. 정달식 문화부 선임기자 doso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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