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트북 단상] 최고시민 말고 동료시민

부산닷컴 기사퍼가기

최혜규 라이프부 차장

박형준 부산시장은 당선 직후 문재인 대통령과 가진 간담회에서 “불편한 말씀부터 드리겠다”며 두 전직 대통령의 사면을 건의했다. 사면의 당위는 차치하고 그들을 “한때 국민을 대표했던 최고시민”이라고 지칭한 것에 귀를 의심했다. 시민의 선출로 권력을 위임받았다가 탄핵되거나 중범죄로 수감된 전직 대통령은 과거에도 지금도 최고시민일 수 없다. 무엇보다 시민은 위계를 나눌 수 있는 단어가 아니다.

실언으로 넘기기에는 이 말이 두고두고 불편했던 것은 선거 기간에도 여전히 그저 시민, ‘동료시민’으로 인정받기를 원하는 외침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민주사회의 시민은 누구나 자유롭고 평등한 권리를 갖는다. 누군가에게는 숨쉬는 것처럼 당연한 이 명제를 위해 어떤 사람들은 존재를 걸고 투쟁한다. 그러나 그들은 합당한 응답 대신 고통을 받는다. 우선 전직 시장의 성폭력을 고발한 이들이 그랬다.

그리고 성소수자들이 있다. 안철수 국민의당 서울시장 예비후보는 2월 TV 토론에서 퀴어축제 참가 의사를 묻는 질문에 “그런 것을 거부할 권리”를 말하며 도심 외곽 개최를 권했다. 트랜스젠더 인권운동가 김기홍 씨는 다음날 SNS에 “우리는 시민이다. 보이지 않는 시민, 보고 싶지 않은 시민을 분리하는 것 그 자체가 주권자에 대한 모욕이다”라고 적었다. 닷새 후 그는 “너무 지쳤다”는 말을 남기고 세상을 등졌다.

3월 31일은 국제 ‘트랜스젠더 가시화의 날’이었다. 추모의 대상은 늘었다. 그달 초 변희수 하사가 성전환수술 이후 강제전역이 되지 않았다면 전역했을 날을 사흘 지나 숨진 채 발견된 것이다. 국가인권위원회는 트랜스젠더 가시화의 날 성명을 통해 “트랜스젠더가 존재를 드러내기 위해 용기를 내야 한다는 자체가 우리 사회의 차별 인식을 여실히 보여준다”면서 성소수자 차별 철폐를 위한 정부와 국회의 노력을 촉구했다.

또다른 죽음으로 시작된 장애인 이동권 투쟁은 올해 20주년을 맞았다. 2001년 오이도역 리프트 추락 참사 이후 장애인들은 버스, 지하철, 도로를 점거하고 이동권 보장을 요구했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아무도 장애인의 고통을 돌아보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투쟁은 현재진행형이다. 지난달에는 장애인 활동가 4명이 장애인 이동권 투쟁으로 수년간 쌓인 벌금 4400만 원 대신 ‘하루 10만 원’ 노역 투쟁에 나섰다.

트랜스젠더 가시화의 날과 장애인 이동권 투쟁의 의미는 분명하다. 우리 곁에 그들이 있음을 알리고 동료시민으로서의 권리를 요구하는 것이다. 사회의 안전망 속에서 정체성을 드러내고 원하는 곳으로 갈 수 있는 권리는 모든 시민의 것이기 때문에 동료시민은 그들에게 연대할 의무가 있다. 시민 수천 명이 변 하사의 복직 소송 승계를 탄원하고, 사흘 만에 장애인 활동가들의 벌금을 모금한 것은 그 때문이다.

시민이 선출한 정치인의 의무 또한 명백하다. 누구도 차별받지 않고 무엇보다 죽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는 차별금지법 제정은 정치가 더이상 미룰 수 있는 의제가 아니다. 동료시민의 자리에서 밀려난다고 느끼는 사람이 갈수록 늘어나는 사회는 퇴행이다. 선거의 여진 속에 부동산, 가상화폐, 군대 이슈만이 정치권을 부유하는 지금도, 절망하고 있을 동료시민들이 우리 곁에 있다. iwill@


당신을 위한 AI 추천 기사

    실시간 핫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