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 사랑방·공동체 허브 역할 ‘추억의 구멍가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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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멍가게 이야기 / 박혜진·심우장

tvN에 방영되는 프로그램 중에 ‘어쩌다 사장’이란 게 있다. 시골 가게를 덜컥 맡게 된 배우 차태현과 조인성의 시골 슈퍼 영업일지다. TV 속에 나오는 가게는 동네 사랑방 역할을 한다. 슈퍼면서 버스 터미널 매표소에 간단한 음식도 판다. 이걸 보면서 시청자들은 아련한 옛 추억을 떠올린다.

전남 22개 시·군 구멍가게 답사보고서
상점 이외 외부세계와 소통하는 기능도
매대 인기 상품 통해 사회변화 모습 조명
가게 주인들 삶의 고단함과 흔적 ‘감동적’

하지만 이런 동네 구멍가게를 이젠 시골에서조차 쉬 볼 수 없는 게 안타까운 현실이다. 어떤 마을은 아예 가게가 없는 곳도 있다.

이렇게 사라져가는 동네 구멍가게를 조명한 책이 <구멍가게 이야기>이다. 한국표준산업분류에 따르면 구멍가게는 165㎡(50평) 이하의 시설을 갖춘 음식료품 위주 종합 소매점으로 규모가 더 큰 슈퍼마켓이나 체인으로 운영되는 편의점과 구별된다.

문학을 전공한 저자들은 “구멍가게라는 공간이 그저 구시대의 추억거리에 불과한 걸까?”라는 의문을 품고, 우리의 일상 속에서 구멍가게가 있어 온 모습, 구멍가게가 짊어온 역할을 하나하나 되짚어본다. 책은 일종의 구멍가게 답사보고서다. 답사 지역은 전남 지역 22개 시군에 위치한 구멍가게 100여 곳이며 이중 책 속에 등장하는 인터뷰 대상지는 50여 곳이다.

현지답사를 통해 본 구멍가게는 단순히 물건만 파는 곳이 아니었다. ‘연산상회’처럼 우체국·택배업체와 마을을 이어주는 운송대행사, 외상은 물론 돈을 빌려주기도 하는 마을 은행, 마을 입구에서 버스를 기다리는 정류장, 아이들의 놀이터이자 어른들의 놀이판, 안주가 무상·무한 리필되는 술집, 소식과 정보를 공유하는 사랑방 등, 마을 공동체와 바깥 세계를 이어주는 연결점으로 다양한 역할을 하고 있었다.

“뭐든지 소식 정보를 들으려면 여기를 와. 여기를 한 일주일간 빼먹잖아? 그러면 마을에서 초상나도 몰라, 오늘 뭐 결혼식이 있어도 모르고. 여기서 정보가 흘러가고 정보가 나오고. 담양 ‘영천리 구판장’ 주인아주머니의 말이다.

저자는 말한다. “구멍가게는 단순히 물건만 파는 곳이 아니라, 공동체 내의 다양한 관계들이 연결되는 지점인 동시에 외부세계와의 연결이 이루어지는 네트워크의 결절점, 즉 허브(hub)다”라고.

구멍가게의 특별한 내부 모습과 참신한 인테리어, 과자·라면·담배 등 익숙한 상품들에 담겨 있는 생활문화사 등 책은 구멍가게에 대해 우리가 잘 몰랐던 다양한 면모도 보여준다. 특히 구멍가게 매대 가운데 자리를 차지했던 인기 상품을 통해 사회 변화와 시대상을 살펴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1971년 출시된 새우깡은 인기가 얼마나 대단했던지 신문 광고에 외상은 안 되고 현금으로만 판매한다는 문구가 붙기도 했다. 또 같은 회사에서 만든 라면을 사야만 새우깡을 살 수 있던 시절도 있었다. 초코파이를 훔치려는 좀도둑이 극성을 부렸다는 일화도 재미있다.

구멍가게의 바탕에 깔린 정서는 가게 주인들의 삶의 고단함이다. 농촌 마을에서 구멍가게를 운영한다는 것은 농사지을 땅 한 평 갖지 못해, 자식들을 돌보며 벌어먹어야 해서, 어쩔 수 없이 선택한 마지막 길인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동네 이웃이기도 한 가게 손님을 상대하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진상 취객을 상대하는 일부터 외상값 받아내고 떼이는 일, 농번기면 쉴 새 없이 들이닥치는 진흙투성이 술참 손님들까지. 치열한 삶의 고단함과 그 흔적도 놓치지 않는다. 무엇보다 한편으로 1990년대 이후로 농촌 인구 감소에 따라 줄어드는 손님과 읍내에 들어선 대형마트 때문에 운영 자체가 힘들기도 했다.

여기에 또 다른 어려움이 더했다. ‘연산상회’ 할머니는 “숭보믄 안 되지. 넘 말 허믄 못써. 긍게 요것도 가게 헐라믄 입이 무거야 혀. 나불나불 쌈이나 붙이고 못써”라고 말한다. 이처럼 구멍가게 주인에게는 무겁고 신중한 입이 필요했다. 사람들이 많이 접촉하는 공간이기에 말이 덧붙여져 자칫 오해와 갈등이 생길 수도 있기 때문이다.

구멍가게라는 공간이 마을 안팎의 네트워크를 구축하는 데 중요한 연결점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가게 주인이 감정과 이성을 적절히 통제, 중심과 주변, 사람과 사람 사이의 경계에서 ‘아슬아슬’한 중간자의 역할을 잘해왔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기까지 가게 주인은 마을공동체의 일원에 속하면서도 거기에서 늘 한 걸음 떨어져 있는 주변인이어야 했다.

이렇게 구멍가게의 곡진한 사연을 듣다 보면 안타깝고 마음이 무거우면서도, 이상하게 한쪽에서 힐링이 된다. 사연을 통해 동질감과 공감을 느껴서다. 저마다 어쩔 수 없는 선택에 직면하기도 하고, 그에 따른 고단함을 겪곤 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이 책은 ‘그럼에도 우리의 삶은 계속된다’는 것을 새삼 일깨워주는 삶의 치유제이기도 하다. 순수하고 따뜻했던 시절의 기억과 함께 저마다의 삶에 위로를 건네는 책이다. 박혜진·심우장 지음/책과함께/488쪽/2만 8000원.

정달식 선임기자 dosol@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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