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택광의 지발도네(Zibaldone)] 대학의 위기는 무엇인가

부산닷컴 기사퍼가기

경희대 글로벌커뮤니케이션학부 교수

학령인구의 감소가 본격화한 올해 각 대학에 비상이 걸렸다. 특히 지방에 위치한 사립대의 경우는 존립의 위기감을 느끼고 있다는 소식이다. 이런 상황은 지금까지 잠복해 있던 대학에 대한 근본 질문을 제기하게 만들고 있다. 특히 팬데믹의 상황이 초래한 대학 교육의 파행은 지금까지 우리에게 자명한 것으로 받아들여졌던 대학이라는 고등 교육 제도를 뿌리부터 회의하게 한다. 아이러니하지만, 파행적이나마 원격 기술을 통해 다른 방식으로 교육이 가능하다는 이 사실 자체가 대학 제도의 효용성에 대한 지난 문제 제기들을 증명하고 있는 셈이다.

우리에게 대학이라는 제도는 유럽 계몽주의의 유산이었다. 중국의 근대 사상가 량치차오는 미완의 과학소설 <신중국 미래기>에서 60년 후에 도래할 미래 중국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로 교육을 꼽고 있다. 그만큼 량치차오에게 교육은 비교 불가한 근본 문제였던 것이다. 근대 아시아에서 근대화의 조건은 군주의 ‘신민’이 아니라 공화국의 ‘국민’을 만들어 내기 위해 서양의 근대 교육 제도를 도입하는 것이었고, 그 교육의 실행은 대학의 설립을 통해 가능한 일이었다. 아시아가 당시에 만들어내고자 했던 ‘국민’은 군주제를 혁파하고 공화국을 건설할 부르주아 계급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 부르주아 계급의 재생산과 그 이후 이어진 노동 계급의 형성에서 아시아의 근대 대학 제도는 필수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이런 대학 제도의 성립은 민족국가 또는 국민국가 건설이라는 당대의 열망과 함께했다.

대학 제도는 서구 계몽주의의 유산
아시아, 근대화 때 관료·산업 인력 양성
팬데믹 시대·체제의 변화와 맞물려
새로운 가치와 위상 근본적 성찰 요구

민족국가가 가능하려면, 각 구성원을 평등한 ‘민주 시민’으로 탈바꿈시켜야 한다. 토머스 홉스처럼 그 ‘민주 시민’을 대표하고 한 몸처럼 움직이게 할 ‘참주’가 필요하다 할지라도, 그 참주의 권위는 과거 군주제처럼 하늘로부터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여론이라는 수학적인 결과물을 통해 부여받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근대 국가를 만들어내는 유물론적 토대이고, 초창기 아시아의 대학은 이런 서양의 유물론을 적극 전파하는 것이었다. 이런 관점에서 오늘날 글로벌화의 진행과 함께 동서양의 구분이 미약해진 이 세계의 특징을 한마디로 정의한다면 아마도 이렇게 초창기 아시아 대학의 설립자들이 받아들였던 유물론의 승리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근대화의 염원은 ‘탈아’, 다시 말해서 ‘아시아를 벗어나자’라는 구호로 암암리에 통용되었지만, 당시의 ‘탈아’가 반드시 ‘서양처럼 되자’는 것은 아니었다. 역설적으로 초창기 아시아 대학들이 지향한 것은 서양의 기술에 동양의 정신을 담아야 한다는 믿음에 기초하고 있었다. 근대 초엽 각국에 세워진 아시아 대학들을 방문해보면, 이런 설립 이념을 표현하는 조형물들을 심심찮게 발견할 수 있다. 최첨단 시설을 갖춘 현대식 건물들과 나란히 서 있는 그 낡은 건축물들은 과거의 아시아와 현재의 아시아를 대비시켜 보여주는 증거들이다.

대학은 이처럼 국가의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공간이기도 하다. 대학의 위기는 이런 의미에서 하나의 기관이 직면한 문제라기보다 민족국가라는 근대 통치 장치에 임박한 변화의 조짐이라고 할 수 있다. 지방 대학의 위기는 지방 경제권의 소멸을 의미한다. 단순하게 대학에 진학할 인구가 줄어들었다는 사실에 그치지 않고, 그 대학과 함께 했던 물적 토대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을 요구하는 사건인 것이다. 민족국가라는 목표가 사라진 세계에서 우리는 ‘각자도생’ 이외에 다른 삶의 가치를 내세우지 못하고 있다. 대학의 위기는 이런 목표의 상실과 무관하지 않다.

유럽 계몽주의의 산물로서 시민 계급을 길러내던 고등 교육기관인 대학은 아시아의 근대화 과정에서 관료와 산업 인력을 길러내는 국가기관의 역할을 수행했다. 국가의 기업화는 민주주의와 맞물리면서 ‘주인 없는 시장’과 ‘책임 없는 정치’를 만들어냈고, 겉으로 보기에 국가는 퇴거하고 개인만이 도드라진 것처럼 보이게 되었다. ‘1960년대 중국’을 박진감 있게 그려냈던 량치차오조차도 예견하지 못했던 상황이다. 이런 조건에서 팬데믹의 상황은 근대 교육기관으로서 기능했던 대학의 의미를 더욱 위기에 빠트렸다. 이 위기는 본질적으로 앞으로 어떤 가치를 추구해야 할 것인지 우리가 고민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발생한다는 생각이다.

대학생들이 교수들에게 어떤 투자 종목에 투자하는지 묻는 세상에서 대학 교육의 의미는 무엇일까. 학령인구 감소라는 구체적 위기의 도래 훨씬 전부터 대학 교육은 길을 잃은 것인지도 모른다. 팬데믹 이전의 ‘정상 회복’을 꿈꾸기보다 그 정상성에 가려 보이지 않았던 것들을 다시 생각할 때다. 무엇보다 이 힘든 시기 이후에 움켜잡고 나아가야 할 삶의 가치부터 위기의 대학이 주도적으로 고민해야 할 것이다.


당신을 위한 AI 추천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