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준현의 사람 사는 경제] 임금이 없는 세상, 양반이 없는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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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사회경제교육연구소장

천주학을 믿는다는 죄로 유배 온 서울 양반과 고기 잡아 먹고사는 흑산도 상놈이 만난다. 양반은 상놈에게 성리학을 가르쳐 주고, 상놈은 양반에게 물고기에 대해 가르쳐 준다. 영화 <자산어보>의 이야기다. 다산 정약용의 형인 정약전은 우리에게 그다지 친숙한 인물이 아니다. 그저 누구의 형이라는 것과 <자산어보>라는 책을 썼다는 정도다. 솔직히 나도 다산의 책은 몇 권 읽었으나 <자산어보>는 제목만 알 뿐 본 적이 없다. 그런데 <자산어보>에는 “흑산도에 사는 청년 창대의 도움을 받아 이 책을 썼다”는 언급이 있다고 한다. 영화 <자산어보>는 이 한 마디에 영화적 상상력을 보태 만든 작품이다. 영화에 전문가가 못 되는 내가 작품에 대한 평을 하려는 것은 전혀 아니다. 물론 허구의 이야기일 터지만 영화를 보다가 문득 떠오르는 생각이 있어서 한마디 하고 싶어졌을 뿐이다.

영화 자산어보 속 정약전과 창대
성리학을 공부하고 싶은 서얼
이를 말리는 현실 정치를 아는 양반

임금이 없는 나라 꿈꾸던 약전
‘상놈 주제에’ 무시하는 정체성
개혁과 기득권 사이의 슬픈 이중성



정약전은 양반이고 창대는 상놈이다. 우리가 흔히 오해하는 일은 조선 시대에는 양반과 상놈의 신분 차이가 매우 컸으리라는 것이다. 노비는 신분적으로 차별받은 것이 당연했다. 그러나 양반과 상놈의 차이는 원래 그렇게 크지 않았다. 평민 가운데 과거에 합격해 문반이나 무반에 오르면 양반이고, 그렇지 못하면 상민이었다. 상민은 천민이 아니다. 다만 조선 후기로 오면 권력이 몇몇 유력한 가문들에 독점되고 차츰차츰 양반과 상민의 신분차별이 고착화되면서 상민이 상놈으로 천대받게 된다. 그런데 영화에서 창대는 순전히 상놈인 것도 아니고 양반의 서얼인 것으로 나온다. 어쩌면 창대가 그토록 성리학을 공부하고 싶었던 이유도 어쩌면 자신이 가지지 못한 것을 욕망하는 마음이 있었을 터이다. 그런데 조선 시대에 서얼이 차별받은 것은 맞지만 그렇다고 상놈으로 취급받지도 않았다. 하지만 영화에서 정약전은 창대를 늘 상놈이라고 부른다. 약전의 의도가 양반과 상놈의 차이를 말하려는 데 있는지, 반대로 굳이 양반으로 살지 못하면 어떻고 또 상놈으로 살면 어떠냐는 데 있는지는 모르겠다. 아무튼 이미 타락한 정치 현실을 목격하고 몸으로 체험한 약전은 그런 창대에게 과거를 보고 출세할 욕심을 버리라고 꾸짖는다. 하지만 창대는 도리어 약전에게 나리가 꿈꾸는 임금이 없는 나라가 어떻게 가능하냐고 따진다. 영화든 문학이든 중심인물들 사이에서는 이런 갈등이 벌어져야 이야기가 된다. 내가 이해하지 못할 일은 정약전의 이중성이다.

정약전은 성리학은 물론이거니와 성리학에 기초한 조선의 정치와 사상 체계를 부정하는 인물이다. 그런데 서울에서 오랜 벗이 정약전을 찾아온다. 벗은 창대를 보자마자 대뜸 “서간에서 말씀하신 상놈 제자가 이놈이군요” 하고 말한다. 약전은 벗에게 오랜만에 시나 한 수 지으면서 놀자고 말한다. 벗이 창대에게 너도 시를 지을 줄 아느냐고 묻자 약전은 “상놈 주제에 무슨 시를…” 하고 무시해 버린다. 과연 바닷물에 몸을 담그고 비린 물고기들을 손으로 만지면서 탐구하는 정약전과 벗과 함께 시를 농하는 정약전 가운데 누가 진짜 정약전일까. 아무리 보아도 내게는 시를 농하는 양반 정약전이 진짜 정약전으로 보인다. 영화에서 약전은 뼛속 깊이 철저한 양반이어서, 벗과 함께 시를 지으며 양반으로서의 자기 정체성을 확인할 때 진정으로 행복한 인물이다. 임금이 없는 나라를 꿈꾸는 약전이 어째서 양반 상놈의 차별이 없는 세상을 당연하게 여겼을까. 아마 약전이 임금이 없는 나라를 꿈꾼 것은 자신이 임금이 아니었기 때문일 터이다. 마찬가지로 약전이 양반과 상놈의 차별을 당연하게 여긴 것은 바로 자신이 양반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영화 <자산어보>는 개혁을 주장하면서도 자신의 기득권은 포기할 줄 몰랐던 이들의 슬픈 고백록이 되었다. 반대편의 사람들은 더 부패하고 더 타락했지 않았느냐는 변명은 어울리지 않는다. 어차피 그들은 단 한 번도 임금이 없는 나라를 꿈꾸어 본 적이 없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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