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달식의 공간읽기] 창인 듯, 화폭인 듯… 캔버스 닮은 벽면 회화적 느낌 ‘물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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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광신도시 ‘AB Origine’

어느 순간, 우리의 거주 공간은 온통 아파트로 바뀌어 버렸다. 도시는 물론이고 한적한 시골에도 아파트가 들어서는 세상이 됐으니 말이다. 프랑스 지리학자 발레리 줄레조가 2000년대 중반 “한국은 아파트 공화국이다”라고 했을 땐, 반론이라도 해 볼 수 있었지만, 이젠 그마저도 무색해져 버렸다.

마치 기계로 찍어낸 것 같은 아파트가 이젠 우리가 사는 삶의 공간 전부가 돼 버렸다. 부산의 신(新)주거지 일광신도시에도 아파트는 숲을 이룬다. 하지만 일광신도시엔 오롯이 아파트만 있는 게 아니다. 자세히 보면 단독주택들도 있다. 부산 기장군 일광면 삼성리가 대표적이다. 이곳 단독주택 단지에는 제각기 다른 모양의 상가주택들이 많다.

새로운 ‘도시문화’ 구심적 역할
상가와 주택 결합, 새 형태로 지어
일광 주택단지에 ‘좋은 집’ 구현
서양화가 폰타나 공간주의서 영감
공동주택에 대적하는 메시지 담아


■회화적·조소적 느낌 ‘물씬’

하얀 건물 ‘AB Origine’(이하 오리진·2020년 부산건축상 은상)은 이중 단연 이색적이다. 가끔 집 근처를 지나가는 사람도 이 집엔 창문이 잘 안 보인다며 어디에 창문이 있느냐고 묻곤 한다는 그 집이다. 실제 1층 상가를 제외하면, 2~4층엔 창문이 많지 않다. 한쪽 면만 보면 창문이 거의 없는 건물처럼 보인다. 하지만 창문이 없는 게 아니다. 일부는 숨겨져 있거나, 있어도 유리창이 없으니 그렇게 느껴지지 않을 뿐이다.

유가건축사사무소(대표 유대우)가 설계한 오리진은 대지면적 327㎡, 연면적 487㎡에 철근콘크리트 구조를 한 지상 4층 규모의 상가주택이다. 1층은 상가(혹은 사무실), 2층은 원룸(4세대), 3~4층(복층)은 건축주가 사는 주택으로 쓰인다.

건물 이름이 궁금했다. 왜 AB Origine일까? 유대우 건축사는 “획일적 아파트 문화에서 벗어나 새로운 도시문화의 구심점 역할을 하면서 상가와 주거가 결합한 색다른 형태의 집을 처음 선보인다는 의미다”면서 “단독주택단지에 깃발을 잘 꽂아 좋은 집을 만들어보자는 기원이 담겠다”고 말했다.

건물 이름만큼이나 건물 외벽이 먼저 존재감을 드러낸다. 무엇보다 외벽은 다양한 모습으로 살아 숨 쉰다. 문인가 하면, 바람구멍이고, 창문인가 하면 화폭이 된다. 때론 빛을 가두는가 싶더니 열어둔다. 거실 앞 테라스 위엔 지붕도 없다. 비가 오면 빗물 그대로를 느낀다. 하늘을 바로 바라볼 수 있다는 건 이미 마음이 풍성하다는 거다. 더하여 회벽 마름으로 미장(스타코)한 콘크리트 벽면과 알루미늄 루버, 무광 패널, 유리와 같은 재료가 잘 어우러져 회화적인 느낌으로 다가온다.

건물은 적당한 공간감을 가지고 비워진 덩어리(매스) 속에 자연의 원색과 구조체의 백색이 어우러져 공존하는 형태다. 건물은 보는 방향에 따라 조금씩 다른 느낌으로 다가온다. 동쪽에서 봤을 때는 마치 두 개의 덩어리가 비어 있는 공간(보이드)을 사이에 두고 합쳐져 있는 것 같지만, 북쪽에서 봤을 때는 2, 3층 테라스 공간이 신비감을 더해, 새로운 공간으로 들어갈 것 같은 착각에 빠진다. 유 건축사는 “이 디자인은 ‘공간을 가로질러 빛나는 형태’라는 아르헨티나 출신의 서양화가이자 조각가였던 루치오 폰타나(1899~1968)의 공간주의 작품에서 영감을 얻었다”고 했다. 폰타나는 빈 캔버스에 구멍을 뚫거나 날카로운 칼자국을 넣은 커팅 작품을 통해 새로운 공간 개념과 공간의 창조를 보여주었다.

유 건축사는 “폰타나가 구현한 공간을 이번 건축에 차용, 흰 벽면에 젖혀진 공간처럼 보이게 해, 단독주택이 공동주택을 향해 대적하는 것 같은 메시지를 전달하고 싶었다”고 했다. 마치 젖혀진 공간이 ‘서늘한 눈빛’이 되어 천편일률적인 공동주택을 응시하듯 말이다.

일광신도시 아파트가 매우 화려하다면, 오리진은 차분하면서도 기품있는 느낌이다. 유 건축사는 “단순 심플하면서도 마치 오브제를 놓듯이 비어 있는 공간과 루버를 통해 포인트를 줘 조소적 느낌이 물씬 들게 했다. 이렇게 한 것은 궁극적으로 일광신도시 아파트들과 차별화해 단독주택단지가 상대적으로 더 고급스러워 보이게 한 의도다”고 말했다. 이게 이 집의 상징처럼 되었다.



■벽돌 벌집쌓기·루버 통한 빛의 향연

2019년 6월 건축주가 설계를 의뢰했을 때만 해도 이곳 주택단지는 허허벌판이나 다름없었다. 건축주는 집을 잘 아는 이였다. 건설사 대표로 기장에서 태어나 지역에 대한 애정도 높았다. 유 건축사에게 직접 이곳에서 살 거라며 사람 살 만한 집을 만들어 달라고 요구했다. 건축주가 직접 시공을 맡았다.

유 건축사가 가장 고민했던 부분은 주택단지가 바둑판처럼 구획이 정리돼 있었기 때문에 인접한 집(부지)과의 프라이버시 확보였다. 생활상 불가피한 채광, 환기창을 일정 부분 내어주어야 했기에 ‘사생활 보호와 필수로 요구되는 창과의 적절한 조화를 어떻게 풀 것인가?’가 가장 큰 고민이었다. 설계에만 꼬박 3개월이 걸렸다. 건축주와 소통하며 여러 차례 수정 과정도 거쳤다. 이렇게 해 탄생한 3·4층 공간에 건축주도 만족해했다.

건축주는 “처음 설계 도면을 봤을 때 일반적인 건물 평면이 아니었다. 목수들도 고난도 작업이라며 ‘이걸 어떻게’라고 할 정도였다. 하지만 결국 해 냈다. 많은 설계 사무실을 접해 보고, 또 유가건축이 편한 집을 설계하는 것을 쭉 봐 왔기에 이에 대한 믿음과 신뢰가 있었다”고 말했다.

유 건축사는 건물 곳곳에 마당이나 테라스를 넣어 건물과 사람이 다 함께 숨 쉴 수 있게 했다. 또 높이차를 두어 북쪽 방이 중정을 통해 햇빛이 잘 들어올 수 있게 했다. 3면이 도로인 점을 고려해 외벽은 소음을 최대한 막아주고 내부 중정은 안을 열어줘 사용자의 시선이 안으로 모이도록 유도했다. 특히 부엌과 안방, 욕실 곳곳에 빛이 유입될 수 있는 오픈 공간을 만들어줘 빛이 항상 내부에 머물도록 했다. 빛은 시간을 만나 공간의 속살을 여지없이 드러낸다. 빛의 향연이랄까. 이미 이곳은 감성적 공간으로 변모한다. 부엌과 거실 창을 통해 바라본 자연은 계절마다 바뀌는 한 폭의 풍경화다. 적절한 루버 활용도 돋보인다. 조소적 느낌과 함께 빛을 적절히 제어해 감성적 공간을 연출한다. 또 건물 층고를 4.3m로 높여 거실의 개방감과 깊이감을 더했다. 유 건축사는 “건물 층고를 높여 수평적으로 평창 하지 못하는 부문을 수직적으로 살렸다”고 설명했다.

보통 욕실은 거실이나 안방, 작은방에 밀려 협소하고 상대적으로 열악한 환경에 있다. 또 개방하기도 쉽지 않다. 하지만 오리진에서는 이런 고정적 관념을 여지없이 깨버린다. 이를테면 욕실 옆에 테라스라는 오픈 공간을 배치하는 식이다. 그렇다고 외부 시선에 완전히 열려 있는 게 아니다. 테라스 벽면을 마치 큐 블록 느낌의 벽돌 벌집쌓기를 해 안에서는 바깥을 맘껏 볼 수 있지만, 밖에서는 안을 잘 볼 수 없는 구조로 만들었다. 벽돌 틈새로 들어오는 분할된 빛은 상상 이상이다.

흔히 아파트 주방은 북쪽이나 서쪽에 위치해 채광과 시선이 막혀 있었다. 하지만 오리진에서는 가사노동에 많은 시간을 보내는 점을 감안해 시선을 활짝 열어젖혔다. 또 사람 키 높이 이상의 고측창을 둬 측면에서 자연스럽게 빛이 흘러들어오게 했다. 다양한 활동을 할 수 있게 한 옥상 마당도 이채롭다.

가리는 듯 보여주는 공간은 오묘하다. 하지만 살짝 아쉬운 부분도 있다. 중정을 좀 더 시원스럽게 내줬더라면 어땠을까. 그랬더라면 집이 더 우아하지 않았을까. 공간적 비례 문제라서 복잡하다.

아직 일광신도시 단독주택단지에는 집들이 많이 들어서지 않는 상태다. 하지만 유가건축은 오리진을 시발점으로 일광신도시 단독주택단지에서 그 지평을 확실히 넓혀가고 있다. 이미 유가건축은 단지 내에만 상가주택 7채를 설계했을 정도다. 유 건축사는 “다른 건축주들이 집 짓는 걸 직접 보거나 유가건축 홈페이지에 올려놓은 ‘오리진’ 설계를 보고 자기 집도 설계해 달라고 해, 어떻게 하다 보니 이렇게 많아졌다”고 말했다.

유가건축은 ‘유 씨가 짓는 집’이란 의미와 함께 유니크(Unique·다른 것과 구별되는), 유니버설(Universal·보편적인)이란 의미를 내포한다. 개성 있으면서도 비싸거나 화려한 것보다는 모든 사람이 편안함을 느끼는 건축을 지향하는 유 건축사의 건축 철학이 설계사무소 이름 속에 묻어 있다. 둘 중 굳이 선택하라면 개성(유니크)보다는 편리성(유니버설)이란다.

‘오리진’이 갖는 무게감은 크다. 그 말 자체에 시초, 시작, 첫 발자국이란 의미를 갖기 때문이다. ‘건축은 기계가 아니다’라는 절규의 외침이자 첫발이다. 사명대사의 선시(禪詩)가 문득 생각난다. ‘오늘 내가 걸어간 발자국은 뒷사람의 이정표가 되리니….’ 정달식 선임기자 dosol@busa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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