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명섭의 플러그인] ‘원전 오염수 방류 제국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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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위원

1905년 7월 29일 일본 도쿄. 미국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의 특사로 도쿄에 온 육군장관 윌리엄 태프트와 일본 총리대신이자 임시 외무대신이었던 가쓰라 다로가 비밀회의를 했다. 3가지 사항이 합의됐는데, 핵심 내용은 이미 알려진 것처럼 ‘미국의 필리핀 통치’와 ‘일본의 한반도에 대한 지배적 지위’를 서로 인정해 주는 것이었다. 이미 영국과도 동맹을 체결했던 일본은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계기로 한반도 식민화의 길을 대놓고 추진할 수 있었다. 이 내용은 당시엔 비밀에 부쳐졌다가, 약 20년 만인 1924년 역사학자 타일러 데넷이 논문으로 발표하면서 세상에 알려지게 됐다. 공식 협약인지 아닌지 등 밀약의 성격에 대한 논란이 있기도 하지만, 어쨌든 이 밀약 이후 일본은 열강의 눈치를 보지 않고 제국주의의 길로 나갈 수 있었다.

일본 정부의 후쿠시마 오염수 배출
주변국 반발은 완전 무시한 채 강행

미국 정부 지지가 결정적 요인 분석
1세기 전 ‘가쓰라-태프트 밀약’ 연상

지구 환경 보호 역점 바이든 행정부
모순 행보에 실망, 시대 흐름 역행


우리에겐 치욕적인 식민화의 시작이 됐던 이 밀약을 꺼낸 것은 최근 일본 정부의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 방류 결정이 계기가 됐다. 사안 자체에 대한 대비가 아니라 오염수 방류 결정을 전후로 일본과 미국이 보인 행보가 100여 년 전 당시와 엇비슷한 점이 많았기 때문이다.

원전 오염수 방류를 저울질하던 일본 정부는 지난 13일 주변국의 극심한 반발이 빤한데도 이를 결정했다. 앞으로 2년 뒤부터는 수백만 톤의 막대한 오염수가 태평양 바다로 쏟아진다. 모두 방류하는 데 약 30년이 걸린다고 한다. 한마디로 주변국엔 날벼락 같은 일이 아닐 수 없다. 우리나라 등 아시아권은 물론 태평양을 공유하고 있는 환태평양권도 일본 정부의 행위로 인해 앞으로 그 끝을 알 수 없는 공포와 두려움에 떨게 됐다.

국제환경단체인 그린피스가 작년에 낸 보고서인 ‘2020년 후쿠시마 방사성 오염수 위기의 현실’에 따르면 오염수에 들어 있는 삼중수소를 비롯한 많은 방사성 원소는 바다 생태계를 통해 수만 년간 축적돼 먹거리부터 인간의 유전자까지 심각한 피해를 줄 수 있다고 한다. 당장 지금 세대만이 아니라 먼 미래 세대도 그 해악에서 벗어날 수 없다. 일본 정부의 방류 결정을 ‘해양 핵 테러’라는 섬뜩한 말로 비난해도 다 고개를 끄덕이는 이유다.

일본 정부가 이렇듯 안하무인 격으로 방류 결정을 내릴 수 있었던 것은 지금까지 정황으로 미루어 보면 특히 미국의 지지 입장이 결정적인 요인으로 보인다. 미국은 일본 정부의 방류 결정 이후 일관되게 “국제 안전 기준에 따른 것”이라며 일본 정부를 두둔하고 있다. 중국 언론 매체들이 “미국도 공범”, “일본이 오염수 방류 결정을 내린 것은 미국의 용인 때문”이라며 미국 배후설을 제기하며 그 이중성을 강도 높게 비난해도 현재로선 미국의 기류가 바뀔 것 같지는 않다.

지난 18일 서울에서 정의용 외교부 장관과 만난 존 케리 미국 대통령 기후특사의 태도는 이를 단적으로 보여 준다. 그는 오염수 방류와 관련해 우리 측의 협조 요청을 받았음에도 기자회견에서 “일본이 가능한 모든 방안을 검토했다”라며 검토 과정의 투명성까지 언급하며 일본 입장을 적극적으로 감쌌다. 한국 내 여론이 일본 정부를 성토하며 들끓고 있는 데도 우리 측 요청을 대놓고 거부한 것이다.

특히 일본 정부의 결정이 바이든 미국 대통령과 스가 총리의 대면 정상회담을 사흘 앞두고 나왔다는 점에서 미국과의 사전 조율설마저 나온다. 일본이 수년 전부터 미국의 양해를 얻으려고 노력해 왔다는 점과 그동안의 대미 추종 외교를 겹쳐 생각해 본다면 언뜻 고개가 끄덕여질 만도 하다. 초강대국의 양해만 얻으면 주변국 입장은 상관없는 듯한 일본 정부의 태도가 얄팍하고 못마땅하기 그지없다. 그에 대한 보답인지 미국은 지금까지 일본 정부 지지를 명시적으로 밝힌 유일한 나라다.

미국 정부의 이런 태도는 새 행정부 출범 이후 보인 모습과 상반돼 우리로선 실망감을 감출 수 없다. 바이든 대통령이 취임식 뒤 가장 먼저 한 공식 업무가 트럼프 전 대통령이 탈퇴했던 파리기후협약 재가입 행정명령 발동이었다. 기후 변화 대처 등 지구 환경과 인권 보호에 역점을 두겠다는 표시였다. 세계 각국은 미국의 행보에 박수와 함께 큰 기대감을 보였다.

그런데도 지금 지구상의 수십억 명은 물론 미래 세대의 생명과 안전까지 심각한 위협을 주는 일본 정부의 제국주의적 결정을 제지하기는커녕 지지하고 있으니, 정말 이해가 되지 않는다. 지구 환경과 인권 측면에서 자가당착일 뿐만 아니라 이와 관련해 더욱 긴밀한 국제 공조가 필요한 시대적 흐름에도 찬물을 끼얹는 꼴이다. 두고두고 인류에게 재앙이 될 일본 정부의 ‘원전 오염수 방류 제국주의’를 막지 못한다면 21세기의 앞날이 걱정되지 않을 수 없다. 바다는 정말 강대국만의 독점물이 아니다.

kms01@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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