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사문난적’ 몰린 윤휴의 삶·사상 오롯이 되살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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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기어가 된 조선 유학자, 윤휴/이덕일

백호 윤휴(1617~1680). 일반인에게는 다소 낯선 이름이다. 하지만 그가 살았던 길을 조금이라도 알면, 그에게 푹 빠질 수밖에 없다. 그는 그 시대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몰려 1680년(숙종 6년) 사형당했다. 그의 죄는 세 가지였다.

서인들이 절대시하던 주자 학설 거부
사대부 특권 타파 주장하다 희생양

첫째, 주자의 학설을 거부하고 자신만의 독보적인 학문 세계를 구축하고자 한 죄. 둘째, 서인 당파의 당론이었던 북벌 불가에 저항하며 조선을 동아시아의 맹주로 만드는 부국강병을 도모한 죄. 셋째, 사대부 계급의 특권을 타파하고 반상과 남녀의 차별을 넘어선 세상을 실현하려 한 죄.

이 때문에 그는 죽었고, 그의 이름은 조선 최대의 금기어가 되었다. 하지만 그가 죽은 후 조선은 침묵과 위선의 세계로 빠져들었다. 더는 그와 같은 생각은 허용되지 않았다.

그가 죽은 지 340여 년이 지난 지금, 역사가 이덕일은 이름을 호명하며 그를 불러온다. 는 조선시대 입에 담는 것조차 금기시되었던 윤휴의 삶과 사상을 오롯이 되살려낸다.

성장기 전란을 겪었던 윤휴에게는 특별한 스승이 없었다. 이 때문에 어떤 제약도 받지 않은 채 학문 세계에 몰입할 수 있었다. 주자(주희)는 을 33장으로 나누고 장의 끝에 장하주라는 이름으로 해석을 붙인 후 다시 130개 절로 나누었다. 하지만 윤휴는 이런 주자의 구분을 따르지 않고 10장 28절로 나누었다. 단지 주자와 다른 장절 구분을 했다는 이유로 주자를 절대시하던 서인으로부터 사문난적으로 몰렸다.

당시 집권층 서인들은 겉으로만 북벌을 외쳤지, 속으로는 북벌 불가가 당론이었다. 하지만 윤휴는 북벌을 통해 조선을 동아시아 맹주로 만들려 했고, 평민들을 위한 무과인 만인과를 실시하고 전차를 제작하는 등 실제적인 북벌을 추진하려 했다. 그리고 북벌 준비를 위한 구체적인 기관으로 체부를 설치하고, 황해도에서 전차를 만들었지만, 이 역시 역모의 빌미가 됐다.

윤휴는 죽은 사람과 갓난아이까지 군포를 부과하는 군적수포제 대신 양반·사대부들이 군역을 함께 짊어질 수 있는 호포법과 구산법을 주장했다. 또한 성현의 말씀을 배우는 데는 남녀 구별이 없다고 여기고 여성들에게도 학문을 가르쳤다. 이게 당시 그의 죄라면 죄였다.

나와 다른 너를 인정하지 않았던 시대. 나와 다른 너는 죽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시대. 그리고 실제 그렇게 죽여왔던 시대. 윤휴는 그런 침묵과 위선의 시대 희생양이었다. 그의 사후 수백 년이 흘렀지만, 이 세상은 크게 달라진 게 없다. 아직도 그의 이름을 지우고 있는 우리 시대는 그를 살해했던 시대보다 나은가? 윤휴는 지하에서 묻고 있는지 모른다.

단재 신채호 선생이 여순 감옥에 있었을 때, 읽고 싶었던 책이 이었다고 한다. 바로 백호 윤휴 전집으로 지금은 란 이름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덕일 지음/다산초당/396쪽/1만 8000원. 정달식 선임기자 doso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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