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혜영의 시인의 서재] 식탁을 차리는 예수와 그릇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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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시와사상’ 편집위원

벚꽃이 지고 검은 나뭇가지에 파릇한 잎사귀가 돋아났다. 철쭉이 피는 사월에 문득 죽음을 생각한다. 돌아가신 분의 영혼은 우주 너머 어딘가에 계시리라 믿지만 정말 그런 건지 가끔 회의가 생긴다. 그냥 모든 것이 자연으로 돌아가 사라지는 것 같다. 그러다 부활절이 오면 십자가에 매달려 죽은 예수를 떠올린다. 나사렛이라는 유대의 시골 마을에서 모함을 받고 죽은 그가 죽기 직전에 한 일은 식탁을 차리는 일이었다. 제자들과 함께 빵과 포도주를 나눠 먹고 마셨다.

가족이 함께하는 아침 식사가 소중하듯
모든 일상에는 경건과 신성 깃들어 있어
'진리는 곧 아름다움'이라는 시구처럼
작은 것이 싹 틔우는 영원의 가치 느끼길

아침마다 식탁을 차리면서 그를 생각한다. 일상의 작은 행위 안에 깃든 신성을 우리는 간과하는 것이 아닐까. 밥이나 빵을 차리는 엄마 혹은 아빠의 몸짓에서 가족이라는 경건한 울타리를 새삼 발견한다. 후기 자본주의 사회의 지나친 경쟁과 권력에 휘둘리지만 가족이 오손도손 모여 밥을 해 먹는 것이 새삼 소중하다. 가격이 치솟은 파와 계란에 마음 한구석이 불편하다. 한 끼의 식사를 차리기 위해 애쓰는 주부의 경제적 가치는 단순한 가격 이상의 의미를 담고 있다. 사랑은 재화로 환산하기 쉽지 않기 때문이다.

주부의 돌봄 노동이나 가사 노동에 대해 좀 더 가치를 부여할 필요가 있다. 미래 세대는 엄청난 집값과 고용 불안 때문에 결혼도 미루고 아이도 포기하는 경우가 많다. 청년들에게 용돈처럼 지급하는 도움의 방식이 아니라 한 가정을 튼튼히 꾸려 나갈 사회적 토대를 구성하는 게 시급하다. 혼자 벌어서 먹고살기가 점점 힘들어지는 여건에서 식탁을 차리는 훈훈한 남자들은 우리 시대의 예수이다.

요즘은 대학가의 연애 풍속이 바뀌어, 남자가 자신의 원룸에 파스타 요리와 와인을 준비해 여자 친구를 초대한다는 얘기를 들었다. 이전에는 가정에서 요리는 여자에게 전담된 것으로 여겼는데 신세대의 가치관은 현저히 변화했다. 하지만 부엌의 노동에서 중장년층의 남성은 서비스를 제공받는 위치를 점유한 경우가 많다. 부부가 함께 경제 활동을 할 때에는 가사 노동을 적절하게 분배하는 게 좋은 관계와 장수를 위해 필요하다.

식사를 준비하는 남자를 생각하다 문득 영국의 낭만주의 시인인 존 키츠(John Keats)의 시 ‘그리스 항아리에 부치는 노래’를 떠올린다. 키츠가 그리스 항아리에 그려진 목가적인 그림을 시적 소재로 쓴 시인데 마지막 구절은 다음과 같다. ‘영원처럼, 차가운 전원시(田園詩)여!/ 세월이 우리를 시들게 할 때도,/ 너는 남아 있으리라. 우리의 근심과는 다른 비애 속에서,/ 사람의 벗으로서,/ ‘아름다움은 진리이며, 진리는 미’라고 말하리라./ - 이것이 당신이 이 지상에서 아는 모든 것,/ 당신이 알 필요가 있는 모든 것.’ 키츠는 미(Beauty)의 영원한 가치를 그리스 항아리에서 발견한다.

오래전 그리스에서 사 온 화병은 토분인데 그리스의 전통 문양이 그려져 있다. 항아리가 지닌 아름다움 속에서 진리를 발견하는 키츠의 시가 새롭게 와닿는다. 몇 년 전부터 그릇들을 조금씩 수집해 왔다. 일요일 아침 가족과 식사할 때 식탁보를 깔고 아름다운 그릇으로 세팅을 하면 잔잔한 기쁨이 번진다. 일상의 작은 변화이지만 힐링이 된다.

유럽 그릇의 역사는 중국과 일본 도자기에서 비롯되었는데, 현재 백화점 그릇 코너의 고급 매장에는 독일 마이센, 덴마크 코펜하겐, 영국 웨지우드, 프랑스 하빌랜드 등의 그릇이 차지하고 있다. 동양에서 비롯된 도자기가 유럽의 기술 혁신과 협업 시스템으로 거듭난 현상이다.

한국 도자기는 개인이나 가족 중심의 가마에서 구워지던 전통이 우세해 첨단 기법을 동원한 유럽의 생산 방식과 비교할 때 조금 뒤처진 느낌이 들어 아쉽다.

물론 개별 도자지가 갖는 예술성은 또 다른 차원이다. 몇 년 전 삼성의 리움 미술관에서 열린 전시에서 고려청자를 감상했다. 사실 한국 도자기를 더러 보아 왔지만 크게 감동을 받지 못했는데, 리움 미술관의 소장품은 수준이 아주 높았다. 그 은은한 세련미와 고아한 품격은 경이로웠다. 저렇게 앞선 기술을 선조들이 지녔는데 역전을 당한 느낌이 든다. 기술 혁신과 예술적 감각을 동원하여, 한국의 그릇이 전 세계에서 주목받는 또 하나의 한류가 되기를 기대한다.

스물여섯 살에 결핵으로 숨진 키츠가 말한 ‘아름다움이 진리’라는 시어에서 천재성을 발견한다. 최첨단의 문화는 일상의 작은 곳에서 싹이 자란다. 연두색 식탁보에 레이스를 겹쳐 우아한 식탁을 연출하고 미니 화병에 꽃을 꽂는다. 식탁을 차리는 예수의 부드러운 매너가 우리 사회를 더 풍요롭게 할 것이다. 가사 노동에 지친 아내를 배려하는 남자가 불러오는 봄의 빛깔은 연두 빛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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