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성원 칼럼] 증오와 폭력의 팬데믹 시대, 출구는 '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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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실장

배우 윤여정이 아카데미 시상식에 참석하기 위해 미국으로 떠났다. 영화 ‘미나리’로 여우조연상의 유력한 수상 후보로 꼽혔지만 “(LA에 사는) 아들이 오스카 시상식 참석차 미국에 왔다 길거리에서 해코지를 당할 수 있다고 걱정하더라”며 아시아인 증오 범죄를 염려하던 참이었다. 영화 ‘기생충’으로 지난해 아카데미상 4관왕에 오른 봉준호 감독은 시상자로 오스카 무대를 밟는데, 미국 영화인들을 향해 “아시안 증오 범죄에 두려워 말고 맞서라”고 촉구했다. 용기 있는 한국의 두 영화인에게 박수를 보낸다.

세계 곳곳에서 인종차별 범죄 기승
국가와 조직 차원의 폭력도 잇따라
코로나 팬데믹이 인성 파괴의 온상?

위기 속 기회 찾는 한국 ‘희망적’
젊은이들 ‘존버’ 정신으로 헤쳐 나가
정치권, 용기와 희망의 백신 내놓아야


3월 16일 조지아주 애틀랜타에서 한인 4명을 비롯하여 8명이 숨진 총기 난사 사건 이후 크고 작은 아시아인 증오 범죄가 미국에서 잇따르고 있다. 얼마 전에는 조지 플로이드 사망 사건 1주기를 앞두고 미네소타주에서 경찰이 흑인 청년에게 총을 쏴 숨지게 하는 사건도 발생해 흑인 인권운동 BLM(Black Lives Matter, 흑인 목숨도 소중하다)이 재점화할 조짐이다. 최첨단 문명을 자랑하는 세계 최강대국 미국의 민낯이다.

한국인이 겪는 인종차별 범죄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영국에서는 축구선수 손흥민(토트넘 소속)이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의 경기에서 파울을 당한 것도 억울한데 “쌀 먹는 사기꾼” 등 맨유 팬들의 ‘악플 세례’를 받았다. 칠레에서는 한 TV 코미디쇼가 방탄소년단(BTS)을 소재로 삼아 중국어 억양과 북한 김정은 등을 섞어 아시아인 혐오를 드러냈다.

조직과 국가 사이에서도 폭력이 잇따르고 있다. 2월 1일 미얀마 군부는 민주정부를 전복하는 쿠데타를 일으켰고, 저항하는 시민을 향해 무차별 총격을 가해 사망자가 500명을 넘어섰다. 가까운 일본은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를 태평양에 방출하겠다는 계획을 밝혀 “오염수 방류는 전 세계 인류에 대한 핵 공격”이라는 규탄을 자초했다. 미국과 중국이 반도체 등을 둘러싸고 벌이는 경제전쟁도 다른 나라에 ‘적이냐 아군이냐’를 분명히 하라며 폭력적인 양상으로 전개되고 있다.

세계 곳곳에서 증오와 폭력이 난무하고 있다. 문제는 개인이나 조직 혹은 국가가 이 같은 증오와 폭력에 뾰족한 대책을 내놓기가 어렵다는 점이다. 그러니 무력감 혹은 무기력만 날로 늘어 간다. 여기서 혐의 하나가 고개를 든다. 코로나 팬데믹이 증오와 폭력의 세계적 대유행을 낳은 게 아닌가 하는 의혹 말이다. 코로나19라는 병마에 시달리고 실업으로 고통받는 데다 팬데믹이 언제쯤 끝날지 알 수 없다는 절망까지 겹쳐 사람들을 증오와 폭력의 극단으로 몰아가는 인상이기 때문이다.

국내는 어떠한가. 코로나 팬데믹으로 가장 휘청이는 세대라면 일자리를 찾지 못해 고통받는 청년층일 것이다. 4차 대유행의 목전에서 사회적 거리 두기 강화로 영업에 막대한 지장을 받는 자영업자도 마찬가지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대한민국 각계각층, 중소기업에서부터 대기업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고통의 시간을 통과하고 있는 게 사실일 것이다. 하지만 증오와 폭력의 세계적 대유행에서는 어느 정도 비켜나 있는 듯하다.

위기 속에서도 기회를 찾는 이들이 있어 되레 한국사회는 희망적이다. ‘존버’ 정신의 젊은이들이 그들이다. 존버는 비속어인 ‘존나’와 ‘버티기’의 합성어로 회자하기 시작했는데, 차츰 ‘끈질기게 버틴다’ ‘존중하며 버틴다’로 진화 발전했다. 주식이나 비트코인 시장에서 사고팔고 사고팔고 하는 ‘사팔사팔’이 아니라 오를 때까지 기다리는 존버다. 취준생도 직장인도 자기 자리에서 희망을 잃지 않고 존버다. 그들은 해체 위기를 딛고 역주행에 성공한 걸그룹 브레이브걸스의 ‘롤린(Rollin’)’을 들으며 열광한다. 평균 나이 서른을 넘긴 이 걸그룹은 ‘존버는 승리한다’고 외친다.

한국정치가 존버로 무장한 젊은이들을 제대로 챙기지 않았다가는 톡톡히 낭패를 당할 것이다. 강물은 배를 띄우기도 하지만 화가 나면 배를 뒤집을 수도 있다는 군주민수(君舟民水·임금은 배, 백성은 물)가 케케묵은 공자님 말씀이 아니라 현실에서 언제든 재현될 수 있다. 4·7 보궐선거에서 여당이 뒤집어지고 야당이 물 위로 떠오른 데는 지지 정당을 바꾸면서까지 정치에 희망을 버리지 않는 젊은이들의 존버가 끼친 영향이 크다.

한국정치는 이제 다시 격랑의 바다로 항해를 시작했다. 11개월도 채 남지 않은 2022년 3월 9일 제20대 대통령 선거와 그 뒤를 이은 6월 1일 제8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민심이 요동칠 것이기 때문이다. 1년 3개월짜리 부산·서울시장 자리를 꿰찬 야당 입장에서는 정권심판의 교두보를 확보했다고 낙관할 일만은 아니다. ‘바꿔 보니 소용없더라’는 민심이 작동하면 보궐선거 승리가 독이 될 수도 있다. 존버 세대는 과감한 세대교체와 쇄신을 통해 팍팍한 세상에 용기와 희망의 백신을 내놓을 정당을 끝내 기다릴 것이다. forest@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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