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홈네트워크’ 아파트, 이름은 ‘그럴싸’ 실상은 ‘맙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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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파트 세대 안의 현관문·조명·난방 등을 제어하는 ‘지능형 홈네트워크 설비’가 법적으로 반드시 설치돼야 하지만 적지 않은 아파트에 이 설비가 없거나 부실하게 시공되는 실정이다. 필수 설비가 제대로 갖춰지지 않으면서 정전이나 해킹에 무방비로 노출돼 사고나 사생활 침해 등이 우려된다. 일부 입주민은 국토교통부에 직접 하자심사를 신청해 '미시공으로 인한 재산권 침해'를 인정받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이 같은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다.

상당수 시공사, 설비 의무 안 지켜
정전 때 사고나 해킹 무방비 노출
준공 검사마저 허술, 불법 키워
입주민 “재산권 피해” 소송까지

14일 통신설계 업계에 따르면 ‘지능형 홈네트워크(이하 홈네트워크)’를 표방한 아파트는 관련 법에 규정된 기술기준을 따라야 한다. 홈네트워크란 실내는 물론이고 실외에서도 출입문, 전등, 난방 등 집 안의 장치·기능을 제어할 수 있는 ‘사물형 인터넷(IoT)’을 말한다. 거실 벽에 부착돼 집안 기기를 조작할 수 있는 모니터 화면인 ‘월패드’가 대표적이다.

정부는 2008년 주택법을 개정해 홈네트워크 시대에 대비했다. ‘주택건설기준 등에 관한 규정’ 제32조의 2(지능형 홈네트워크)를 신설한 것이다. 이듬해인 2009년 국토부, 과기부, 산자부 등 3개 부처 장관 공동으로 설비설치와 기술기준을 최초로 고시했다. 의무 설비 20가지 중 핵심은 정전 때 홈네트워크를 가동하는 ‘예비 전원장치’와 해킹을 방지하기 위한 ‘홈게이트웨이’다. 홈네트워크를 설치하는 30세대 이상 아파트는 반드시 법적 기준에 따라 이 설비를 갖춰야 한다.

이 같은 기준이 있지만 실제 아파트 시공 과정에서 제대로 지켜지지 않는 실정이다. 예비 전원장치가 없을 경우 정전이 되면 세대 내 전등, 난방, 가스 등 모든 기기에 대한 통제력을 잃는다. 또 홈게이트웨이가 없으면 세대끼리 연결된 인터넷망을 통해 해킹에 무방비로 노출된다. 세대 내 인터넷망을 통해 옆집 현관문을 열거나 전등을 끄거나, 심지어 카메라로 다른 집 사생활을 훔쳐볼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건설사들은 비용 절감 등을 위해 이를 제대로 지키지 않는다. 허술한 건축 인허가, 준공 심사는 이 같은 불법을 키우고 있다. 익명을 요구한 통신설계 관계자는 “법 준수 여부를 감독해야 할 지자체가 손을 놓으면서 비용을 최소화하려는 시공사들은 의무 설비를 제대로 설치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대부분의 시민은 이 같은 사실을 모르는 상황이다. 엄청난 돈을 치러야 살 수 있는 것이 아파트인데 결정적인 하자가 있는 것이다. 2018년 준공된 1500여 세대 규모 경남 김해시 A아파트의 입주자대표회의는 시공사를 상대로 재산권 피해를 주장하며 소송을 준비 중이다. 세대마다 설치된 홈네트워크에 예비 전원장치가 설치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A아파트 관계자는 “예비 전원장치뿐 아니라 법에 명시된 20가지 의무 설비가 대부분 제대로 설치되지 않아 입주민들이 재산권 피해를 보았다”고 소송 이유를 설명했다. 지난해 서울행정법원은 전남의 한 건설사에 대해 ‘예비전원장치의 미시공은 명백한 하자’라는 판결을 내리기도 했다.

수년간 홈네트워크 설비 기준 준수를 지적했던 부산 북구의회 김태식 의원은 “최근 아파트들은 지능형 홈네트워크 시설을 내세워 분양가를 더 끌어올린다”면서 “법적 기준을 지키지 않았다면 사실상 ‘사기분양’이나 다름없다”고 말했다. 김 의원은 “정전과 해킹에 취약한 상태로 아파트가 들어서는 것을 지자체가 나서서 막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성현·이상배 기자 kksh@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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