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 칼럼] "부산일보 사회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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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지연 사회부 차장

늦은 시간 불이 꺼진 신문사 사무실. 정적을 깨고 사회부의 팩스 소리가 울린다. 정부가 추진하는 신설대학 설립에 관한 익명의 제보 문서. 다음 날 출근한 민완 기자는 문서를 보자 정권에 정면 도전하는 역대급 제보임을 감지한다.

몇 년 전 일본에서 개봉한 영화 의 첫 장면이다. 드라마나 영화 속 ‘제보’의 현장은 보통 긴장감이 넘친다. 거대 권력의 견고한 성에 균열을 내는 한 개인의 비장하고 외로운 외침, 뭐 이런 느낌으로 묘사된다. 하지만 ‘현실 제보’의 모습은 사뭇 다르다. 일단 제보는 팩스로 잘 보내지 않는다. 팩스는 제대로 전달되지 않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제보 담당하는 사회부 내근차장 5개월 차
부동산·갑질 호소 등 생활형 제보 쏟아져
시민 이야기 속에서 언론 위기 돌파구 찾아

현실 속 제보는 주로 전화로 이뤄진다. “거기 신문사죠? 내가 정말 억울한 일을 당했는데…”로 시작하는 식이다. 종종 어디에 전화했는지 모르는 분들도 있다. 며칠 전 재건축 피해 상황을 20분가량 설명하던 한 어르신은 말미에 “친절하게 이야기 들어줘 고맙다. 국민의 방송은 역시 다르다”고 말하고는 전화를 끊었다.

제보를 관리하는 신문사 내근 차장으로 일한 지 5개월이 됐다. 내근 차장 업무를 맡은 후 거대 권력의 비리를 제보 받는 행운(?)은 아쉽게도 없었다. 경험상 그런 류의 제보는 제보자가 신뢰할 만한 기자를 골라 전달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사회부 경찰기자 시절, “그동안 쓴 기사를 검색해보고 연락을 했다. 제보 문서를 사직구장 관중석 어디에 놔두겠다”는 메일을 받은 적 있다. 출입문이라도 열려 있을까 긴가민가하며 언급된 날에 현장에 갔더니 거짓말처럼 자료가 있었다.

기자 개인이 아니라 사회부에 들어오는 제보는 억울함을 호소하거나 불합리한 제도를 고발하는 내용이 다수다. 제보를 전담하다보니 최근 사람들이 가장 울분에 찬 일이 ‘부동산’이라는 것을 자연스레 알게 됐다. 평생 살던 집을 팔고나자 갑자기 집값이 올라 화병으로 쓰러지기 직전이라거나 원주민이 원하지 않는데도 재개발 사업을 추진하니 막아달라는 전화들이었다. 재개발 보상금 시비와 조합비 횡령을 고발하는 전화도 심심치 않게 걸려온다. LH 사태 이후에는 강서구의 투기 실태를 고발한 투서도 있었다.

‘갑질’도 단골 제보 소재다. 한 독거노인은 해운대 ‘부자 아파트’에 사는 집주인이 10평도 안 되는 월세집의 보일러를 안 고쳐준다며 악덕 주인을 망신주고 싶다며 전화를 하셨다. 자동차 사고가 난 부하 직원에게 직장 상사가 친구의 정비소를 소개해주고, 바가지요금을 씌웠다는 제보도 있었다. 공익성이 낮거나 진위여부를 가리기 어려운 경우는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기관을 안내하지만, 얼마나 억울하면 신문사까지 전화를 할까 싶어 같이 마음이 답답해진다.

기사로 반드시 써야 하는 제보를 받을 때면 흥분을 가라앉히기 어렵다. 요양병원의 허술한 방역 시스템에 울분을 토했던 어느 간호사, 부산역 서점의 폐점 소식을 안타까워한 서점 단골 고객, 부산경찰청 소속의 한 경찰의 비위를 알게 된 시민 등 많은 이들의 제보가 주요 지면을 장식했다.

‘셀프 디스’를 하자면, 내근 차장을 하면서 신문사를 찾는 사람들이 ‘아직도’ 많아 놀랐다. ‘신문의 멸종 위기’를 20년 가깝게 들어온 입장에서, 제보를 하겠다며 전화든 우편물이든 신문사의 문을 두드리는 이들이 반갑다. 국민청원이나 SNS 등 억울함을 직접 전달할 창구가 예전보다 늘었다고 하지만, 여전히 자신의 이야기를 대신 해줄 누군가가 필요한 이들이 많은 것이다. 개인의 일상을 짓누르는 부당함을 언론이 공론화할 수 있다는 믿음 혹은 기대는 여전했다.

사회부에는 제보가 아니라 항의 전화도 자주 온다. 근래에는 조국 전 법무부 장관이나 윤석열 전 검찰총장, 가덕신공항 기사가 주된 대상이었다. 재미있는 것은 똑같은 기사를 두고, 누구는 친정부 성향의 ‘어용 언론’이라 욕하고, 누구는 ‘보수 야권 대변지’로 폄훼한다는 점이다. 특정 세력과 결탁해 기사를 쓴다고 확신하는 이들은, 어떤 답변을 해도 ‘기레기의 변명’으로 치부했다. “요즘 같은 시대에 누가 신문을 보나요?” “기자들은 확인도 하지 않고 한쪽 이야기만 쓰잖아요!” 대놓고 모욕당하는 일은 언제나 당혹스럽다.

앞서 언급한 영화 도입부에는 주인공인 기자가 취재 자료를 모으는 모습과 시사 프로그램이 오버랩 되는 장면이 나온다. 한 출연자가 “기술적 정치적 변화로 미디어는 위기에 처해 있다. 하지만 정작 미디어는 위기감이 부족하다”고 진단했다. 영화의 주제인 ‘부당한 정치권력에 맞서는 저널리즘’을 직설적으로 주문하는 장면이지만, 언론의 위기는 사람들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성실함에서 최초의 돌파구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기자들이 모욕을 감내하면서도 현장에 가고, 내근 차장이 제보 전화를 반가워하는 이유다. sjy@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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