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을 여는 시] 분홍역에서 / 서규정(19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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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득히 멀어져 가는 기적소리를

늦은 봄비로 그쳐 세우리

우산꽃, 분홍잎새 활짝 핀 유리창에

부서지고 깨어지며 몰려 나간 안색들

어디로 가는 것일까

저마다의 싸움에서조차 한쪽 편을 들어주고

얻은 전흔의 전리품인가 반쪽 잘린 차표를 쥐고

몇 번이나 밖을 내다보다가 사라져 간다

그래 가장 낮은 목소리들이 사는 가슴 깊숙이

철렁 그물을 던져도 아무 것도 걸리지 않는

우리들의 삶이란 허탕칠 때 비로소 아름다웠다

남아 있는 것들은 제 이름을 부르며 돌아서는

봄날의 간이역

반쪽을 줍다가 나머지를 잃어버린 우리

흔들리며 떠나던 유리창에 우산꽃은 지고

우리들은 깊이 박힐 못 하나의 모습으로

언제까지 제 얼굴을 외우며 서 있어야 한다



-시집 (1992) 중에서-


삶을 허탕 칠 때 비로소 아름다워지는 것이 어디 사랑뿐이랴. 반쪽 잘린 차표를 가지고 한 쪽 편으로 가야 하는 모든 삶의 편향성이 어디 정치에만 머물러 있으랴.

노동자문학을 대표하는 시인들이 남기는 노래는 자본가와 노동자 계급 사이의 갈등을 보여주며 노동의 참됨이 자본의 밑바탕에 깔려 있음을 보여준다. 모두에게 따뜻한 햇살마저도 눈여겨 비추어 주지 않는 노동의 현장을 육화하여 노래하는 서규정 시인은, 다른 노동 시인과는 달리 노동자 계급의 미래와 전망을 노래하지 않는다. 스스로 서정성이 바닥난 시라고 자평하는 그의 노동시는 역으로 노동의 서정적 위치를 시로 보여주고 있다. 이 시에서는 노동을 하면서 잃어버린 반쪽을 아쉬워하는 그의 여린 감수성을 읽어볼 수 있다. 부산의 유일무이한 노동자 시인도 이제는 전설이 되어가고 정부가 여러 번 바뀌어도 힘든 자는 여전히 힘든 세상에서 서규정 시인의 굵은 전라도 목소리가 그리워진다. 이규열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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