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물썰물] 멍 때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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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에 가득 봄 풍경 날마다 짙어진다/낮잠 깨어 창가에 멍하니 앉았다가'는 여말선초의 문신이자 학자인 변계량(1369~1430)의 시 '잠에서 일어나(睡起·수기)'의 일부다. 이 시구에 등장하는 '멍하니'는 요즘 말로 바꾸면 '멍 때리며' 정도가 될 터이다. 아무 생각 없이 멍하니 있는 상태 또는 넋을 잃은 상태를 흔히 ‘멍 때리기’라고 한다. 일각에선 이를 ‘시간 낭비’라며 비생산적인 행위로 보기도 한다. 하지만 뇌 전문가들은 멍 때리기가 뇌에 도움이 된다고 말한다. 2001년 미국 신경과학자 마커스 라이클 박사는 사람이 눈을 감고 아무런 생각을 하지 않는 ‘멍 때리는’ 상태에 있을 때 뇌의 특정 부위가 작동한다는 것을 확인했다. 이 부위를 DMN(Default Mode Network)이라고 하는데, DMN은 뇌 활동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세상을 바꾼 창의적인 아이디어도 멍 때리기 상태에서 나온 경우도 있다. 요컨대 뉴턴은 사과나무 밑에서 멍하니 있다가 떨어지는 사과를 보고 만유인력의 법칙을 알아냈다. 잭 웰치는 GE 회장 시절 매일 1시간씩 창밖을 멍하니 바라보는 시간을 가졌다고 한다.

멍 때리기의 시작은 웁쓰양이라는 행위 예술가가 2014년 멍 때리기 대회를 서울 한강 변에서 개최하면서 널리 알려지게 됐다. 그는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으니 기분이 아주 좋았던 경험을 바탕으로 대회를 열었다고 한다.

멍 때리기의 핵심은 ‘바라봄’과 ‘잊어버림’이다. 망(望·바랄 망)이면서 동시에 망(忘·잊을 망)이라고나 할까. 생각을 비운다는 점에서 불교의 무아(無我)나 무념무상(無念無想)과도 흡사하다. 하지만 말처럼 자기를 잊는다는 게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국립해양박물관은 오는 22일 ‘지구의 날’을 맞아 해양의 중요성을 되새겨 보는 ‘바다 보며 멍상(멍 때리기+명상) 하기’ 행사를 박물관 옆 ‘아미르공원’에서 진행한다. ‘따스한 봄볕 느끼며 멍 때리기’(봄멍) 하기에 4월의 봄은 너무나 좋은 계절이다. 어디 바다멍(해멍), 봄멍만 있겠는가. 타닥타닥 타들어 가는 장작불을 보며 멍 때리는 불멍을 비롯해 비멍, 산멍, 숲멍, 바람멍도 있다. 지금 우리는 코로나19로 몸만 아픈 게 아니다. 뇌도 스트레스를 받는다. 그래서 가끔은 뇌에 쉴 틈을 주는 게 필요하다. ‘바다 보며 멍 때리기’ 행사가 국립해양박물관 관계자의 말처럼 ‘코로나 블루’에 잠겨 있는 국민이 바다와의 교감을 통해 일상 속 생기를 되찾을 수 있는 시간이 되었으면 한다. “뇌에 휴식을 주자.” 정달식 문화부 선임기자 doso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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