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대 시대정신 반영한 ‘형상미술’ 재조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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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 ‘민중미술’ 너머에는 ‘형상미술’이라는 더 큰 주제가 있었다.

부산시립미술관이 80년대 시대정신을 반영한 ‘형상미술’을 재조명하고, 한국미술사를 다시 읽어내는 자리를 마련했다. 지난달 말 문을 연 1980년대 부산미술조명전 ‘거대한 일상: 지층의 역전’은 당시 부산을 근거로 활동했던 작가 26명의 작품과 한국미술 아카이브 자료를 통해 80년대 시대정신을 고찰한다. 2016년부터 이어지는 부산미술사 정체성 확립을 위한 기획·특별전의 연장선에 놓인 전시이다.

부산시립미술관 ‘거대한 일상’ 전시
지역 연고 작가 26명·4개 주제
답답하고 억눌리고 불합리한 일상
개별 미술언어 사용 입체적으로 표현


70년대 후반부터 90년대 중반까지 ‘새로운 형상성’이라는 화두가 한국 미술계 전면에 등장한다. 이 시기 작가들은 기존의 추상회화나 구상미술과는 다른 색감, 새로운 인체 묘사, 욕망의 표현, 일상에 대한 주목 등으로 ‘지금, 여기 우리의 이야기’를 표현했다. 형상미술은 신구상, 신표현주의, 민중미술로 다양한 스펙트럼을 가졌지만 미술사적으로 제대로 정립되지 못했다.

이번 전시는 부산미술을 이해하는 주요 키워드인 형상미술을 널리 알리고, 모더니즘과 민중미술로 양분된 80년대 한국미술사를 입체적으로 재구성한다. 권영로, 김난영, 김은주, 김춘자, 노원희, 송주섭, 안창홍, 이태호, 정진윤, 정복수, 최석운, 허위영 등 80년대 작가 작품 103점이 주제별로 4개 섹션에 전시된다.

섹션Ⅰ‘현실의 표정-형상의 전개’는 70년대 후반 본격화된 ‘새로운 형상성’의 추구를 읽어낸다. 현실의 구체적 이미지를 발견하고, 개인의 서사에 주목한 작가들의 의식 변화가 보인다. 작가들은 추상으로 표현할 수 없었던 시대 고민을 표현할 미술 언어를 찾았다. 이 섹션에는 형상성 논의와 전개가 민중미술과 같은 시작점에서 나왔음을 보여주는 아카이브 자료를 같이 전시한다.

우선 2020부산비엔날레에서 벽화로 만났던 노원희의 ‘거리에서’ 원화가 눈길을 끈다. 일찍부터 인간의 육체를 이야기한 정복수의 ‘고독을 소독하는 사람’은 강렬한 원색을 바탕으로 작가가 느낀 실존적 감각을 드러낸다. 지층의 표질을 표현한 송주섭의 작업은 인물의 표정이나 피부로 옮겨간다. 건조하고 푸석한 인물의 피부는 노동으로 거칠어진 피부결, 인간이 가진 삶의 무게로 해석된다. 인간과 가장 가까운 물성을 가진 흙을 다룬 그의 작업은 섹션Ⅱ의 테라코타 작업으로 이어진다.

섹션Ⅱ ‘표현의 회복’은 80년대 형상의 시기를 이해하는 키워드이다. 혼란한 시대 속 현실 체험이 소환한 개개인의 자유로운 표현 의식을 드러낸 작품이 전시된다. 이 시기에는 정치·사회적 상황에서 개인 현실에 대한 체험적 진술인 ‘비판적 리얼리즘’도 등장한다. 아카이브 전시에서는 부산미술계에 큰 영향을 끼친 사인화랑 관련 자료를 보여준다.

사인화랑 멤버 예유근 작가는 그림 위에 액자를 배치해 시간성에 갇힌 인물을 비꼬는 콜라주 작업을 보여준다. 같은 사인하랑 멤버인 정진윤은 연극적 무대 연출로 시대의 비극을 드러낸다. 안창홍의 ‘가족사진’은 황폐해진 인간의 내면을 담아냈다. 김은주는 형상미술 2세대 작가로 틀에 갇힌 인물이 벗어나려 발버둥 치는 모습을 종이에 콩테로 그려냈다. 박선은 회화적 요소와 오브제를 더한 서술적 조각을 보여준다.

섹션Ⅲ ‘뒤틀린 욕망’은 부산형상미술의 다원성을 드러낸다. 그로테스크, 욕망, 섹슈얼리티, 과장되고 뒤틀린 인물 묘사로 혼란한 시대를 담아내는 강렬한 표현적 시도가 두드러진다.

주명우는 산업화 시대의 부품에 소설 캐릭터를 접목한 조각으로 황폐한 개인의 삶을 비유한다. 권영로는 욕망을 기괴한 형상의 인물로 표현해낸다. 김경미 학예사는 “민중미술의 단편화된 서사보다 더 입체적으로 당시 시대를 이야기하는 작업”이라고 소개했다. 김미애 작가는 시대와 승패를 알 수 없는 게임을 하는 시대를 게임이나 기계에 갇힌 인물로 형상화했다. 김난영은 성을 소비하는 사회 현상을 비판하는 작품을 보여준다.

섹션 Ⅳ ‘격랑의 시대’는 일상과 인간이라는 형상미술의 대주제를 보여준다. 개인의 애환, 슬픔, 반성, 분노, 연민 , 웃음 등 일상에서 인간이 느끼는 섬세한 감수성을 통해 일상의 입체적 지층을 드러낸다. 이 섹션에서는 개인적 서사에 집중하고 개별적 미술언어를 사용한 부산형상미술 작가의 특징이 드러난다. 80년대 부산 미술계는 민중미술과 상대적으로 거리감이 있었다. 많은 작가가 “하지만 답답하고 불합리한 시대, 정치적 억압에 대해 뭔가 표현해야 하겠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고 김 학예사는 전했다.

박병제는 달동네 소시민의 일상을 따뜻하게 그려낸다. 최석운의 ‘낮잠’은 인물 위를 기어 다니는 쥐와 바퀴벌레로 당시의 정치적 시대 상황을 은유한다. 몽매한 인간은 자신의 잠을 방해하는 존재를 깨닫지 못한다. 장원실은 서로 희생을 감내해야 했던 베이비붐 세대의 감정을 ‘내가 사는 땅-열매 많은 나무’에 담아낸다. 김은주는 역사적 경험을 인간의 표정으로 드러낸 작품 ‘얼굴’을 선보인다. 한 사람의 얼굴이지만 당시의 시대를 대변하는 자화상이기도 하다.

‘거대한 일상: 지층의 역전’은 80년대 문학 작품의 텍스트와 전시 이미지를 콜라주로 만들어보는 전시 연계 체험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이번 전시는 코로나19로 1일 13회 사전예약제로 운영한다. 회당 관람객은 30명이다. ▶‘거대한 일상: 지층의 역전’=8월 22일까지 부산시립미술관 2층. 051-744-2602.

오금아 기자 chris@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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