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병균의 세상 터치] 수에즈운하 말고 북극 항로 선점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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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위원

1904~1905년 러시아와 일본 간에 조선과 만주 지배권을 두고 러·일전쟁이 일어났다. 1905년 5월 27일 대한해협에서 일본 해군과 러시아 최강 발트 함대가 교전했다. 이 해전에서 일본이 단시간에 완승하며 러·일전쟁의 승자가 돼 국제사회로부터 조선에 대한 지배를 보장받았다. 국력이 약해 중국 청나라에 기댄 조선은 1895년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이기자 다시 러시아에 의지했다가 망국의 비운을 맞았다.

러·일전쟁 승패에 지중해와 인도양을 연결하는 해상교통 요충지인 이집트 수에즈운하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유럽에 주둔한 발트 함대가 동아시아 파병을 위해 이 운하를 경유하려고 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했다. 결국 발트 함대는 멀리 대서양과 아프리카 남단 희망봉을 돌아 7개월이나 항해하다 기진맥진한 상태로 대마도 부근에서 일본 해군에 기습당해 궤멸하고 말았다. 부동항 확보에 총력을 기울인 러시아의 남하를 저지하던 영국이 같은 목적으로 영·일동맹(1902년)을 맺은 일본에 협조하느라 발트 함대의 운하 통과를 막은 것이다. 당시 영국이 수에즈운하를 점유하고 있었다. 러시아 군함에 운하를 통항할 수 없는 구조적·기술적인 결함이 있었다는 견해도 있다. 아무튼 수에즈운하는 우리에게 일제강점기라는 쓰라린 역사를 안긴 것이 분명하다.

일본의 조선 지배 안긴 수에즈운하
한국 경제 고도 성장엔 효자 노릇해

운하에서 초대형 선박 7일간 좌초
물류대란 빚으며 막대한 손실 초래

아시아·유럽 간 대체 운송망 요구돼
북극 항로 대비한 전략적 준비 필요


1869년 개통한 이 시설은 길이 193.3km, 폭 160~280m, 수심 14.5m 규모다. 아시아~유럽 항로를 최단 거리로 연결해 세계 해운·물류산업의 패러다임을 획기적으로 바꿨다. 희망봉으로 우회하는 것보다 약 9650km의 거리, 10여 일의 기간이 단축되기 때문이다. 이 운하의 등장은 바람을 이용하는 돛을 단 범선은 급속히 퇴조하고, 증기기관으로 움직이는 배가 대세를 이루는 계기로 작용했다.

우리 경제가 광복 후 비약적으로 성장하는 과정에서 수에즈운하는 효자 노릇을 하는 존재로 바뀌었다. 무역으로 먹고사는 우리나라 수출입 물동량의 99%를 담당해 온 해운업계가 이 운하에 절대적으로 의존하고 있어서다. 이곳은 시간과 연료·물류비를 크게 절감할 수 있는 장점에 힘입어 현재 전 세계 교역량의 12%를 차지한다. 2019년 한 해 운하를 통과한 각종 화물이 10억t에 달한다. 코로나19 팬데믹으로 글로벌 경기가 침체한 지난해만 선박 1만 9000여 척이 운하를 이용했다. 하루 평균 50여 척 수준이다.

아시아·유럽 간 물동량이 수에즈운하에 집중되면서 부작용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지난달 23일 이곳에서 유럽으로 가던 길이 400m, 폭 60m 크기 초대형 컨테이너선이 좌초해 7일간 양방향 통행이 전면 중단됐다. 이 기간에 아시아와 유럽을 오가는 뱃길이 마비되는 바람에 세계 해운·물류업계에 하루 90억 달러(약 10조 2000억 원)의 피해가 발생했다. 사태 장기화가 우려되자 해양수산부와 국적 선사들이 긴급회의를 열어 희망봉으로 돌아가는 방안을 검토하는 등 전전긍긍할 수밖에 없었다. 수에즈발 물류대란이 대체 운송망의 필요성을 일깨운 셈이다.

한국이 수에즈운하에 좌우되는 영향권에서 벗어나는 데는 유럽과 연결된 시베리아횡단철도(TSR)나 중국횡단철도(TCR)를 활용하는 방법이 있다. 이 철도와 부산을 기점으로 한 국내 철도망을 잇는다면, 해운 중심의 국제물류 생태계를 개선하고 부산항을 세계 제일의 허브 항만으로 키울 수 있지 싶다. 동아시아에서 유럽까지 선박으로 30~40일 걸리는 반면 열차는 15~25일이면 충분한 데다 비용이 저렴해 부산으로 화물이 몰릴 것으로 보이는 까닭이다. 하지만 북한에 가로막혀 당장은 실현하기 힘든 실정이다.

이런 상황에서 지구온난화로 북극 빙하가 녹으면서 새롭게 개척되고 있는 북극 항로가 대안이 될 수 있다. 북극해는 2030년께 일반 항해가 연중 가능할 것으로 예상된다. 러시아는 수에즈운하 사태를 틈타 북극 항로 개발과 홍보에 적극적이다. 관련 업계와 학계는 이 항로 이용 시 수에즈운하에 비해 운항일수 22일·비용 28%가 줄어든다고 판단한다. 2018년 8월 머스크 소속 컨테이너선이 부산에서 독일 브레머하펜까지 북극 항로를 통해 항해하며 수에즈운하를 지날 때보다 약 7000km, 16일을 단축해 상업화 가능성을 증명했다.

북극 항로가 활성화하면 물동량이 폭발적으로 증가할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정부가 국가 해양 경쟁력 강화 차원에서 북극 항로를 선점하기 위한 중장기 정책을 마련해 추진해야 하는 이유다. 더욱이 가덕신공항이 들어설 부산은 유라시아 대륙과 북극 항로, 태평양의 관문인 입지적 이점을 잘 살려 북극 항로상의 복합물류 최대 거점도시로 발전하려는 치밀한 준비가 절실하다. 이는 일자리와 먹거리 창출, 경제 살리기가 절박한 부산에 요구되는 성장 전략이 아닐 수 없다. 북극 바닷길을 신성장 동력과 새로운 해양영토로 만들자. kbg@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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