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로365] 달콤한 백 마디 말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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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혜 배우·경성대 연극영화학부 교수

드디어 선거 날이다.

“전교 부회장 후보들은 순번대로 한 명씩 나와서 연설하세요.”

초등학교 내내 단 한 번도 반장을 놓친 적이 없었던 덕에 전교 부회장 후보에 오르는 기회가 주어졌다. 5학년 때 전교 부회장을 하게 되면 6학년으로 올라가서 자연스레 전교 회장이 되는 수순으로 이어지기 때문에 학급선거보다 경쟁이 치열했다.


초등 시절 전교 부회장 선거 출마
짧고 거짓 없이 공약한 친구에게 져

보궐선거, 비방과 거짓 소문 난무
후보자 공약과 자질 판단 흐리게 해

'몰아가기 호소' 등 선거 전략 횡행
진실함·성실성 판단 기준 됐기를

출마한 친구 중 유일한 여성이었던 필자는 재빠르게 여학생들을 공략하는 전략을 펼쳤다. 단 한 번의 기회가 주어지는 연설에서 축제, 수학여행, 졸업 패션쇼 등 여자들의 구미가 당길 만한 공약 하나하나를 일목요연하게 이어 나갔다.

다른 후보자들 또한 기발하고 다양한 공약들로 시선을 끌었다. 초등학교 선거일지라도 어떠한 공약으로 투표율을 높일지 순간순간 눈치 싸움이 살벌하게 이루어졌다.

이제 마지막 후보의 연설만이 남은 상황. 남학생 후보자가 단상 위로 올라가더니 갑자기 실내화를 벗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실내화를 양손에 끼고 번쩍 들어 올리며 큰소리로 외쳤다.

“이 실내화 밑창이 닳아 없어지도록 열심히 뛰겠습니다.” 이 한마디만을 외치고는 뚜벅뚜벅 단상을 내려왔다. 그의 행동에 다들 폭소가 터져 나왔다. 매혹적으로 다가왔던 수많은 공약이 모두의 머릿속에서 한꺼번에 지워지는 듯한 분위기였다. 거품 가득한 멘트보다 짧고 거짓 없는 말 한마디가 결국 그를 전교 부회장으로 당당히 당선시켰다.

선거에서 져 본 적이 없던 필자에게는 매우 충격적인 일이었다. 전교 부회장이 되면 더 이상 방송 활동을 하지 않고 학교생활에만 충실하겠다는 다짐을 했었던 터라 현재로 보면 참 다행인 일이지만 말이다.

어제부로 보궐선거가 끝이 났다.

달콤한 백 마디의 말보다 진솔한 말 한마디가 사람을 움직일 수 있음을 느끼게 해 줬던 어린 시절 그때가 유독 떠오르는 선거 기간이었다.

이번 선거는 자신을 어필하기보다는 상대 후보의 약점을 찾아 드러내고, 각종 비방과 거짓 정보에 대한 소문 퍼트리기에 바쁜 모습이었다. 언론사 또한 일조하는 듯했다. 후보자들의 공약이나 자질을 평가할 수 있는 내용보다는 선정적이고 자극적인 부분에 초점을 맞추는 경우가 많았다. 가족사, 과거사 등 사생활이나 유세 현장에서 나온 상대 후보에 대한 비방 멘트에 더 주목하게 만들었다. 각 후보자의 공약이 무엇인지 고민할 여유도 없이 사람들의 판단을 흐리게 만드는 다양한 이야기들이 계속적으로 흘러나오는 모양새였다.

후보자 어필을 위한 선전 공세도 고개를 갸웃거리게 했다. 시민 개개인의 의사를 집중적으로 공략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시민들에게 대중의 흐름을 어필하면서 후보자에 대한 지지를 정당화시키는 모습이었다. 자신들의 공약을 소신 있게 내세우며 접근하는 것이 아니라, 숨겨진 대중의 지지를 받는 사람이 바로 ‘나’라는 몰아가기 식의 호소 방법이었다.

각종 보도에서 비치는 여론의 분위기가 자신의 의견과 다르게 느껴지면 침묵하게 된다는 ‘침묵의 나선이론’을 역으로 이용하는 모습이다.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미디어에서 보이는 의견을 지배적 여론으로 판단하여 자신과 의견이 다를 경우엔 생각을 표명하지 않거나 반대 의견에 동조하게 되기도 하는 현상이 일어난다. 따라서 선거 보도는 대중의 의견을 보다 신중히 다뤄야 한다. 여론조사나 시민들의 인터뷰 내용을 보고 이들의 의견에 따라 개개인의 의사가 변화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근에는 이러한 우려를 뒤엎는 일들이 나타났다. 지지율이 상대적으로 낮게 나온 후보자들이 여론조사에서 나타난 시민들의 반응보다 침묵하는 다수들이 더 많다는 인식을 대중에게 심어 주고 있었다. 지지 의사를 밝히지 않고 침묵하고 있는 사람들을 이용해서 자신들의 지지율을 높이는 신전략을 내놓은 것이다.

마치 5학년 부회장 선거가 6학년 회장 선거에 막강한 영향을 미치듯, 이번 보궐선거 결과가 내년 대선과 지방선거에 큰 영향을 줄 것이라는 부담감 때문에 이러한 상황이 우르르 쏟아졌는지 모르겠다.

‘샤이 진보’, ‘앵그리 중도’는 공약보다 앞서서 떠오르는 말이다.

부디 샤이하지도 앵그리 하지도 않은, 후보자들의 성실함과 진실성만을 파악한 객관적이고 정확한 선택이었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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