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광식의 인문예술 풀꽃향기] 백자 달항아리 감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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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고신대 총장

누가 내게 가보(家寶)가 무엇이냐 묻길래 한참 망설였다. 동탁(조지훈) 선생의 초당처럼 조촐한 내 삶의 형편 때문이기도 했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니 조우관(鳥羽冠)을 쓴 기마병들이 음각된 중국 한대의 녹옥종(綠玉鐘)들에서부터 추사의 한시가 새겨진 목각 주련이나 대원군의 현판, 또 비췻빛 연판문 고려청자 다완과 우아한 조선 관요의 백자 정다완, 질박한 제주의 목이 긴 웃데기 허벅까지, 구석구석 널부러져 있는 도자기 가운데 무엇을 점할지 주저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누가 나보고 당신 나라를 대표하는 국보(國寶)가 무엇이냐고 물으면 망설이지 않고 우리나라의 보물들은 석물이나 금동도 있지만 아무래도 그중 으뜸은 도자기라고 답할 수 있으리라. 335점의 우리 국보 가운데는 청자 향로와 주자에서부터 백자 달항아리에 이르기까지 도자기가 무려 47점이나 차지한다. 굳이 태평노인(太平老人) 같은 북송 현자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우리는 청자의 나라요, 굳이 야나기 무네요시 같은 예술비평가의 글을 들먹이지 않아도 우리는 분청과 백자의 제국이었다. 우리나라는 까마득한 옛적부터 가야 시절까지 토기의 시대였고, 고려는 청자의 시대였으며, 조선은 분청과 백자의 시대였다. 토기는 서민 이미지, 고려청자는 귀족 이미지, 조선 분청은 민초 이미지를 보여 주는 데 비해, 조선 백자는 선비 이미지를 풍긴다.


우리 국보 중 가장 많은 것이 도자기
한국은 토기와 청자, 분청과 백자의 나라
그중 달항아리는 타의 추종을 불허
모든 아름다움이 집결된 ‘완벽한 신품’

이런 도자기는 압도적인 수량과 탁월한 예술성, 또한 완벽한 역사를 구성할 만한 유구성에서 여타 예술 및 문화 장르의 추종을 완전히 불허한다. 그리고 이러한 우리 도자사의 정점에 서 있는 것이 바로 조선의 백자 달항아리인데, 이것은 우리 고유의 독특한 창작물로서 도자가 지닌 모든 아름다움이 집결되어 있는 최상의 걸작품이다. 첫째, 달항아리는 순결하고 맑은 영혼의 빛깔을 보여 준다. 경기도 광주 금사리 관요에서 나온 달항아리는 눈처럼 하얗고 정결한 순백의 항아리로 소박하면서도 맑은 기운과 고아한 기품을 풍긴다. 중국 도자가 보여 주는 오채(五彩)의 현란함은 잔뜩 치장한 경극의 여배우를 닮았고, 일본 자기가 드러내는 금채(金彩)의 화려함은 예쁘게 차려입은 게이샤와 방불하다면, 수더분하고 고즈넉한 달항아리는 우리네 어진 시골 아낙네 같다. 인격도 고매할수록 소박하고 수수하듯, 예술품도 최고 경지에 이르면 이처럼 꾸민 것이 없고 호들갑스럽지 않다.

둘째, 달항아리는 채움을 위한 엄청난 크기를 보여 준다. 달항아리가 다른 도자 작품들을 압도하는 것은 무엇보다 그것의 대단한 크기와 더불어 높이와 폭이 같은 완벽한 조형미 때문이다. 그 품은 어머니의 가슴처럼 넉넉하고, 자태는 장군처럼 늠름하며, 생김새는 사자처럼 당당하다. 그런데 그 큰 달항아리의 안은 늘 텅 비어 있다. 다른 항아리들은 장을 넣은 장항아리(醬壺), 술로 찬 술항아리(酒壺), 기름이 담긴 기름항아리(油壺), 곡물이 들어 있는 곡물항아리(穀壺), 심지어 화초를 꽂은 꽃항아리(花壺)로 사용되었지만, 달항아리(月壺)는 자태는 풍성하지만 그 속은 가난하다. 이런 큰 달항아리의 비어 있음은 ‘마음의 가난함’, 맑고 깨끗한 빈 마음을 보여 주는 듯하다. 그러나 그것은 풍성한 축복으로 채워지기를 바라는 모습이다.

셋째, 달항아리는 구연부(입구) 및 굽의 직선과 몸통의 완만한 곡선의 조화를 보여 준다. 무엇보다 입에서 어깨를 거쳐 내려오는 종선(縱線)이 배에서 최대한 팽창하여 풍만의 극치를 보여 주다가 급격하게 굽으로 꺾이는 형태에서 조선 장인들의 비범한 솜씨가 드러난다. 달항아리의 둥?E과 완만함, 부드러움과 그윽함, 질박함과 풍성함은 이런 곡선과 결부되어 있다. 야나기 무네요시의 말을 빌리면 중국은 형태의 예술을, 일본은 색깔의 예술을, 그리고 우리나라는 선의 예술을 추구해 왔다. 형태는 크고 안정감이 있어야 하고, 색은 밝고 친근해야 하며, 선은 가늘고 부드러워야 하는데 특히 이처럼 완만한 곡선이어야 한다.

달항아리에는 상(上)과 하(下), 백(白)과 색(色), 공(空)과 만(滿), 직(直)과 곡(曲)의 대립적 원리가 신비로운 결합으로 완벽한 공존과 조화를 보이고 있다. 세상에 이렇게 찬란하면서도 그윽하고, 화려하면서도 수더분하며, 아름다우면서도 푸근한 항아리가 또 있었던가? 중국 징더전(景德鎭) 도자기 골목을 구석구석 누비고 독일의 마이센 공장을 샅샅이 훑어도, 아니 헝가리의 헤렌드나 폴란드의 치미엘루프, 터키의 규라이 촘렉칠릭 같은 세계적 도자 명가를 다 뒤져도 인공미로 가득 찬 반드르르한 인조품들뿐 저렇게 웅장하고 천연덕스러우며 기가 막힌 신품(神品)이 어디 있던가? 그러고 보니 “조선 도자기에는 피가 흐른다”고 한 아사카와 다쿠미의 말은 바로 이걸 두고 한 말이 아니었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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