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 우리는 언제 사과해야 할까, 과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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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남석 문학평론가

지난달 거짓말 같은 기사를 읽었다. 하지만 이 뉴스는 사실이고, 우리는 그토록 듣고 싶었던 소식 하나를 성취할 수 있었다. 기사 제목은 “청년 쏴죽인 5·18 계엄군, 유족 앞 첫 공개 사죄”였다.

그동안 많은 이야기가 5·18 광주와 그 희생에 대한 사연을 다루어왔다. 1900년대 텔레비전 드라마 ‘모래시계’, “나 돌아갈래”라는 외침으로 지금까지 가슴 먹먹하게 하는 영화 ‘박하사탕’, 시간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상황을 냉랭하게 꼬집은 26년 후 그날의 풍경을 담은 영화 ‘26년’.

드라마 ‘모래시계’, 영화 ‘박하사탕’
5·18책임자 진실한 사과 떠올리게 해

‘5·18 계엄군, 유족 앞 첫 공개 사죄’
그토록 고대했던 기사 접하고 전율

미얀마 군부의 시민 탄압 극에 달해
먼 미래 우리 책임 없다 할 수 있을까

이러한 이야기 속에 빠짐없이 등장하는 이들이 있다. 이른바 1980년 5월 광주에 파견된 진압군이다. 흔히 계엄군으로 불리는 그들은, 그날 그곳에 있었으며, 많은 시민(군)을 쫓고 진압하고 체포하는 폭력을 일삼았고, 결국에는 상당한 사상자를 낸 폭력의 주체였다. 앞의 이야기들은 공통으로 계엄군의 만행과 실수 그리고 반성을 포함하고 있다. ‘모래시계’에는 계엄군으로 투입되어 무도한 권력이 야기하는 만행을 목격한 이가 그 권력에 대항하는 이야기가 담겨 있고, 반대로 ‘박하사탕’에는 계엄군으로 큰 고통을 겪었던 이가 그날의 기억을 잃고 타락하는 현실이 담겨 있으며, ‘26년’에는 반성과 참회를 위해 그 후 26년 동안 불가능한 꿈과 목표에 매진한 인물이 등장하고 있다.

동시에 이러한 이야기는 한 가지 목표를 예비한다. 그것은 책임자의 진실한 사과였다. 5·18 광주의 진정한 책임자는 당시 발포 명령을 내린 ‘학살의 지휘자’였겠지만, 그렇다고 그 책임을 무작정 ‘그’에게만 떠넘길 수는 없다. 그래서 우리가 보고 믿고 들어온 이야기 속 계엄군은 그날 이후 늘 죄책감에 시달리며, 사과의 기회만 엿보는 양심적인 가해자로 뒤바뀌어 있다.

한데, 그동안 그 창조된 이야기 속에나 등장하던 이야기가 현실로 나타났다. “5·18민주화운동 당시 계엄군으로 참여했던 공수부대원이 자신의 사격으로 인해 무고한 사망자가 발생했음을 인정하며, 지난 16일 국립5·18민주묘지에서 유족을 직접 만나 사죄와 용서를 구했다.” 관련 기사의 한 구절은 마치 만화 같고 영화 같고 일상을 벗어난 드라마 같은 사연을 전했다.

이 사실을 확인하자, 가슴이 쿵쾅거리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 그리고 이제는 ‘우리’ 차례라는 생각이 들었다. 5·18을 방조하고 그날 광주에 없었다는 이유만으로, ‘모르쇠 학살자’와 그 수족으로서 계엄군에게만 그날의 모든 책임을 떠넘길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날 나는 초등학생이었고, 그날 나는 광주 근처에도 가지 않았고, 그날 나는 공수부대원이 아니었으며, 그날 이후 당시 그때의 학살자를 용서한 적이 없으며, 그날부터 평생 그 책임을 추궁해 왔다는 변명만으로는, 그날의 책임에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2017년 영화 ‘택시운전사’는 책임이 없다고 믿었던 우리에게 한 가지 뼈아픈 실책을 들려주었다. 그날 그곳에, 절대 혼자 두고 오지 말았어야 하는 손님을 그냥 두고 왔다고. 그의 참회처럼, 우리는 그날 그곳에 양심을 두고 왔고, 책임을 두고 왔는지 모른다. 지금 미얀마 군부의 시민 탄압이 극에 달하고 있다. 지금의 내가 미얀마 진압군이 아니고 진압군에게 발표 명령을 내린 적이 없다고 해서, 지금까지 내가 그곳의 시민을 지지해 왔다고 해서, 그곳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에서 나의 책임이 없다고는 말할 수 없을 것이다. 1980년 그날을 방조한 것에 지금 우리 모두가 사과해야 하듯, 미래의 먼 어느 날 너무 먼 이웃의 일이어서 어쩔 수 없었다고 사과하는 일이 반복되지 않기를 바라야 하지 않을까. 41년이 지난 후에야 간신히 미안하다는 말을 할 수 있었던 계엄군의 이야기는, 그래서 지금 우리의 이야기일 수밖에 없다. 그날이 아닌 지금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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