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 불편러라고? 언어 감수성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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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는 존재의 집’이라면 우리의 언어는 어떤 생각과 가치를 담고 있을까. 김해문화재단의 문화다양성 캠페인 ‘말모이’는 이런 질문을 품고 시민 주도로 일상 속 차별이나 혐오 표현을 찾았다. 3년차를 맞은 ‘말모이’ 활동을 통해 참가자들은 불편함을 불편해하는 사람에서 더 많은 불편함을 찾는 사람으로 나아갔다. 그렇게 모은 표현들과 그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문화다양성 침해 표현 수집하는 활동
일상 속에 숨은 차별·혐오 언어 대상
시민 서포터즈 10명, 135개 단어 선정
여성·장애인·노인·청소년·이주민
당사자 네트워크로 차별 경험 나누기도

성숙한 소통 위해선 언어감수성 중요
청소년 교육과 언론·정부의 역할 커


■당황스러움 불편함 놀라움 부끄러움

김해문화재단은 2019년 문화다양성 확산을 위한 정부 공모사업인 무지개다리 사업의 하나로 문화다양성을 침해하는 표현을 수집하는 캠페인 ‘말모이’를 시작했다. 20대부터 50대까지 모두 10명의 시민들이 말모이 서포터즈가 돼 7개월 동안 14차례 모임을 가졌다. 그 결과 연령, 성, 장애, 신체·욕설, 국가·인종 등 분야에서 문화다양성을 해치는 표현 135개를 선정하고 표현별로 문제점과 대체 표현을 소개한 활동자료집을 냈다. 이 활동은 그 해 문화다양성 우수사례 공모전에서 대상을 수상했다.

참가자들이 처음부터 확신을 갖고 있었던 건 아니었다. ‘지금까지 문제 없이 살아왔는데 굳이 바꿀 필요가 있는지 모르겠다’, ‘나쁜 의도 없이 사용한 말이 차별 비하 단어라니 혼란스럽다’, ‘프로 불편러가 된 것 같다’, ‘유난이라고 생각한다’. 취지에 공감해서 모였는데도 첫 모임에서는 이런 의문들이 나왔다. ‘당황스러움, 불편함, 놀라움, 부끄러움’ 같은 감정이었다. 참가자들은 기나긴 토론 끝에 시민들에게 더 많은 사람이 존중받을 수 있는 단어의 선택지를 제안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활동자료집 서문에 담긴 내용이다.

선정된 단어들은 급식충, 된장녀, 틀딱충 같은 전형적인 혐오표현부터 미망인, 머리를 얹다(올리다), 여직원, 효자 상품 같은 관습적인 표현, ○○조무사(기존에 남성들이 해온 직업군에 속한 여성을 ‘제 역할을 못한다’는 부정적인 편견을 담아 비하하는 말), 기생수(기초생활수급자), 병신샷(술자리에서 상황에 맞지 않는 행동을 하거나 분위기를 어색하게 만드는 사람에게 주는 벌주), 흑형(흑인을 대상화하고 흑인에 대한 고정관념을 고착화하는 표현) 같은 신조어를 망라한다. 학부모를 보호자로, 낙태를 임신중단이나 임신중절로 바꾸는 것처럼 달라진 현실을 반영하고 편견 대신 사실만을 담은 표현을 제안하기도 했다.



■반팔, 외할머니, 결정장애는 누구의 관점인가

2년차인 지난해에는 여성, 장애인, 노인, 청소년, 이주민 등 5개의 당사자 네트워크별 참가자를 모집했고, 2019년 서포터즈들은 운영진으로 합류했다. 각 네트워크는 코로나 상황에도 4~9차례 모임을 갖고 혐오표현뿐 아니라 각자가 생활 속에서 겪은 차별의 경험을 나눴다. 여성들의 반응이 특히 뜨거웠다. “20~40대 참가자들이 사전정보 하나 없이 만났는데도 서로 다르면서도 닮은 다양한 여성혐오의 경험을 공유하면서 첫 만남 만에 강한 공감대를 형성했다. 페미니즘을 공부하면서 느꼈던 외로움이나 고립감이 해소되는 경험이었다.” 여성 네트워크 ‘발칙한 XX들’에 참가한 윤현지(27) 씨의 말이다.

장애인 네트워크 ‘별의별 말을 찾는 사람들’이 찾은 표현 중에는 반팔과 외발자전거가 있다. 팔의 길이나 두 개 다리를 ‘정상’ 기준으로 하는 표현이 누군가를 불편하게 할 수 있다면 반소매나 한바퀴자전거로 표현하자는 제안이다. 평균 68세 노인 네트워크 ‘말모이 품앗이 : 희망 품은 황혼’에서는 나이든 남성은 ‘사장님’, ‘선생님’이라고 부르면서 여성 노인은 ‘어머님’, ‘할머니’라고 하는 게 기분 나쁘다는 의견이 나왔다. 손자가 ‘외할머니’라고 부르는 게 섭섭하다거나 ‘니 치매가?’라는 표현이 노인과 치매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강화한다는 지적도 당사자라서 가능한 이야기다.

참가자들은 다른 사람의 입장에 서보고 자신이 속하지 않은 집단과도 소통할 수 있었다. 2019년에는 서포터즈로, 2020년에는 장애인 네트워크 운영진으로 참가한 이윤재(28) 씨는 “처음에는 ‘이런 것까지 바꿔야 하나’ 하는 생각도 있었지만 평소에 자주 쓰던 ‘결정장애’라는 말이 누군가에게 상처가 될 수 있다는 것도, 장애인들은 식당에 들어서는 것부터 쉽지 않다는 것도 깨닫게 됐다”면서 “말모이 활동 이후에는 특히 글을 쓸 때 표현을 고민하느라 생각이 많아졌는데, 이제는 시간이 걸리더라도 더 나은 표현을 찾을 수 있다는 걸 안다”고 말했다.



■교육과 언론, 정부의 역할…말모이는 계속된다

말모이 활동은 다양하게 뻗어가고 있다. 운영진들은 2019년과 2020년 활동자료집을 토대로 혐오표현 카드와 보드게임을 만들었고, 또다른 무지개다리 사업인 청소년 문화다양성 교육 ‘짝꿍’과 연계해 지역의 초등학생과 중학생을 직접 만나기도 했다.

특히 교육의 중요성은 청소년 네트워크 ‘청소하는 악어새’에서도 확인됐다. 청소년들은 참여 소감에서 “대부분 혐오표현인지 모르고 쓴 표현이었고, 소수자들에게 미안함과 창피함을 느꼈다”, “내가 이런 혐오단어를 아무렇지 않게 쓰고 있었는데 아무도 진지하게 말해주지 않은 것에 대해 놀랐다”면서 “활동 이후에는 지적된 단어들을 한 번도 쓴 적이 없고, 주변 사람들이 그런 표현을 쓸 때도 왜 문제인지 일목요연하게 설명할 수 있었다”라고 말했다. 실제로 국가인권위원회의 2019년 청소년 혐오표현 인식조사에서는 청소년들이 학교에서(57.0%), 친구(54.8%), 심지어 선생님(17.1%)으로부터 혐오표현을 경험했다고 답했다.

언론과 정부의 역할도 크다. ‘깜깜이’라는 표현이 언론에서도 자주 등장해 시각장애인을 비하한다는 지적을 선뜻 공감하기 힘들 수 있지만, 지난해 방역당국이 이런 지적을 받아들여 ‘깜깜이 감염’ 대신 ‘감염경로 불명’이라는 표현을 쓰면서 공감대가 넓어진 것이 단적인 예다.

고려대 국어국문학과 신지영 교수는 저서 ‘언어의 줄다리기’에서 언어 감수성이라는 근육은 ‘성찰적 말하기’와 ‘배려의 듣기’를 통해 화자와 청자 사이의 거리를 좁힐 수 있는 힘을 주고, 이렇게 생긴 성숙한 소통의 환경이 성숙한 민주사회의 필요조건이라고 썼다. 노인 네트워크의 최연장자 박용순(81) 씨의 말대로 말모이 참가자들은 불편함을 경유해 ‘새로운 삶의 원칙’, 언어 감수성이라는 근육을 얻었다.

김해문화재단 조가현 씨는 “앞으로도 청소년·성인 대상 교육과 김해시의 문화다양성 언어 캠페인, 당사자 네트워크별 사업·연대 사업 등으로 말모이 활동을 이어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최혜규 기자 iwill@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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