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챙겨야 할 영화는 한국 정서 담은 역사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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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산어보’ 이준익 감독

이준익 감독. 메가박스중앙플러스엠 제공

“한국의 이야기를 우리가 안 하면 누가 하겠어요? 우리의 역사, 지역의 풍광을 영화에 기록하고 싶죠.”

이준익 감독(62)이 자신의 열네 번째 영화인 ‘자산어보’를 선보이며 이렇게 말했다. 충무로 ‘사극 장인’인 이 감독은 이번 작품에선 조선 후기 학자 정약전을 스크린에 불러냈다. 영화 개봉을 앞두고 최근 서울 종로구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만난 그는 “어렵게 공부한 걸 관객에겐 쉽게 전달하는 게 감독의 미덕”이라고 말문을 열었다.

흑산도로 유배된 정약전 소환
조선 봉건질서 변혁 의지 녹여
어류도감 집필과정 흑백영화화
“아름다운 우리나라 풍경도
영상으로 기록하고 싶었다”

31일 개봉한 영화는 순조 1년, 신유박해로 외딴 섬 흑산도로 유배된 정약전이 어류도감 <자산어보>를 집필한 과정을 그린다. 어보 서문의 ‘섬 안에 덕순 장창대라는 사람이 있었으니, 문을 닫고 손님을 사절하면서 독실하게 옛 서적을 좋아했다’는 구절에 이 감독이 영화적 상상력을 더해 빚어냈다. 그간 영화 ‘왕의 남자’ ‘사도’ ‘동주’ ‘박열’ 등 꾸준히 역사 속 실존 인물을 재창조해온 이 감독은 이번엔 정약전과 그의 제자 창대를 다뤘다. 서학을 받아들여 수평 사회를 지향하는 정약전과 조선 봉건질서의 근간인 성리학을 신봉하는 창대가 진정한 벗으로 거듭나는 과정이 인상적이다. 또 조선 후기 세도정치 발호 속 사회 변혁 의지와 혼란스러운 사회상을 자연스럽게 담은 점도 눈에 띈다.

이 감독은 “조선의 근대성에 대한 이야기를 오래전부터 하고 싶었다”며 “2014년쯤부터 동학과 서학을 공부하다가 조선 후기 천주교도 황사영에 대한 연구로 이어진 게 영화의 시작이었다”고 했다. 그는 “당시 황사영이 신유박해 때 피신한 제천 토굴을 찾아갔고, 그를 연구한 신부님도 만났다”면서 “하지만 아직 준비가 덜 됐다는 생각에 접었다. 후에 초심으로 돌아가자고 마음을 다잡았는데 그때 정약전의 <자산어보>가 보였다”고 회상했다. “역사를 알수록 이번 영화를 더 깊고 재미있게 즐길 수 있어요. 약전과 창대의 감정과 여정에 집중하면 바탕에 깔린 시대 상황, 개인의 내재된 욕망과 가치관도 볼 수 있죠.”

이 감독은 이번 작품을 색채감을 뺀 흑백 영화로 만들었다. 전작 ‘동주’에 이은 두 번째 시도다. 그의 새로운 흑백 시대극은 인물의 정서를 더 도드라지게 하고, 투박한 바위가 늘어선 연안과 푸른 바다를 더 깊게 그려낸다. 무엇보다 흑산도 초가 뒤로 비치는 바다 수면 위 반짝이는 햇빛은 한 폭의 수묵화를 연상케 한다. 이 감독은 “컬러 시대의 흑백 영상은 그 자체가 새로운 경험”이라며 “같은 자연조차 그 대상의 본질을 보여주는 신선함이 있다”고 했다. 그는 “흑백 영화로 만드니 조선의 세련된 모습을 곳곳에 담을 수 있었다”며 “흑백인 덕분에 이야기의 본질에 더 집중할 수 있다. 조선의 의복, 갓, 배, 소도구들 모두 정감 있고 세련돼 보이지 않나”라고 웃었다.

이 감독은 “요즘 화제가 된 ‘미나리’도 미국에서 찍었지만, 한국 정서가 밑천인 영화”라며 “한국영화가 장르·현대물로서 세계적인 수준인데 내가 챙겨야 할 것은 역사극이라고 생각했다”고 했다. 그는 “한국의 역사를 살펴보면 소중한 삶과 흔적이 잔뜩 있다. 우리가 끄집어내서 그 가치관을 나누고 조명하지 않으면 그걸 누가 해주겠나”라며 “우리나라 곳곳의 아름다운 풍경도 영상으로 기록하고 싶다”고 덧붙였다. “이번 작품의 촬영은 전남 신안 일대의 도초도·비금도·자은도 등에서 했어요. 도초도와 비금도에 꼭 한번 가보세요. 평생 못 잊을 풍경이 펼쳐질 거에요. 영화 속에서 정약전이 오도독 씹는 ‘생물 홍어’도 삭힌 것과는 다른 맛이니 꼭 맛보시고요.(웃음)”

남유정 기자 honeybee@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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