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물썰물] 봄꽃은 피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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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처럼 변화무쌍한 것도 없다. 아무것도 없던 풀잎에, 나뭇가지에 갑자기 티눈같이 작은 것이 튀어 나온다. 그게 몽우리 지고 부풀어 오르다 마침내 터지는데, 형형색색 꽃잎들과 달달한 향내가 자욱해진다. 지금이 바로 그런 때다. 한철 잠깐 피었다 아쉬움 주는 봄꽃들의 향연이 바야흐로 펼쳐지고 있다.

우리 조상들의 꽃 맞이는 유난했다. 선비들은 특히 매화를 사랑했다. 매화는 겨울과 봄의 경계에 피는 꽃이다. ‘탐매(探梅)’라 하여, 고절하게 핀 매화를 보러 산을 찾았다. 매월당 김시습은 설중매에 푹 빠진 이다. 보름달 뜨고 눈 내리면 어김없이 산길을 나섰다 한다. 엄동설한 속 매화는 봄을 품고 있다. 그 따스한 빛을 미리 심중에 심으려는 것이다. 처지가 안 되는 사람은 집안에 분매(盆梅)를 놓고 완상했다.

산과 들에 꽃이 흐드러지면 본격 상춘(賞春)이 시작됐다. 꽃놀이는 화류놀이, 화놀이, 꽃다림, 화전놀이 등으로 불린다. 꽃잎 따서 전 부쳐 먹는 화전놀이엔 꽃과 술과 시가 빠지지 않았다. 꽃놀이는 부녀자들 사이에도 성행해 ‘사대부 여인이 산이나 내를 찾아 놀이를 벌이면 장 100대에 처한다’는 내용이 <경국대전>에 전할 정도다. 서민들은 지천에 열린 개나리와 진달래, 제비꽃에 감흥했다. 아이들도 빠지지 않았다. 꽃대나 꽃술을 서로 걸고 겨루는 꽃 싸움을 하고 놀았다. 한용운의 시 ‘꽃 싸움’에 잘 묘사돼 있다.

봄은 흔히 청춘의 절기로 비유된다. 그런데 청춘은 자신이 이미 봄이므로 봄을 자각하지 못한다. 그걸 알게 될 무렵은 청춘이 훌쩍 떠난 뒤다. 푸른 기상이 꺾인 뒤에야 비로소 깨닫는 것이 봄이다. 소설가 윤대녕은 <상춘곡>(1996)에서 이렇게 썼다. ‘벚꽃도 불탄 검은 자리에서 피어나는 게 더욱 희고 눈부시리라 믿습니다.’ 지금이 꼭 그렇다. 봄은 오고 꽃은 피는데 뭇사람들과 더불어 봄꽃을 누릴 수 없는 시대. 그래서 봄을 맞는 마음이 더 절절한가 보다.

안타깝게도 진해군항제를 비롯한 전국의 봄꽃 축제가 줄줄이 취소됐다. 옛말에 ‘흉중성매(胸中成梅)’라 했다. 진짜 매화를 만나려면 마음속에 먼저 꽃을 키우고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지금은 이런 가르침을 빌려야 할 때다. 굳이 인파 몰리는 축제를 작정하고 찾지 않아도 상관없다. 꽃을 곁에 둘 수 있는 방법은 많다. 몇몇 지인과 조촐하게 뒷산을 오르거나, 집안에서 꽃 화분에 애살을 붙여 보는 건 어떤가. 자기만의 특별한 봄맞이 혹은 꽃놀이 지혜가 필요하다. 김건수 논설위원 kswoo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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