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가족의 시대가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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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양한 가족, 바뀌는 정책

영화 ‘아이’: 보호종료아동 대학생과 삶이 힘겨운 워킹맘의 공동 육아

일본 정자은행을 통한 시험관 시술로 비혼 출산을 한 방송인 사유리. 가족을 잃고 의지할 데 없는 사람들과 로봇이 새 가족을 구성하는 SF 영화 ‘승리호’. 사람 둘과 고양이 네 마리의 ‘조립식 가족’을 소개한 베스트셀러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 평균 나이 68세 여성 연예인들의 바닷마을 동거 생활을 보여주는 방송 프로그램 ‘박원숙의 같이 삽시다’. 자칭 ‘한국 국적 유부녀 레즈비언’이 자신의 동성 결혼 이야기를 풀어낸 책 ‘언니, 나랑 결혼할래요?’. 시설에서 형제처럼 의지하던 지체장애인과 지적장애인이 함께 살기 위한 과정을 그린 영화 ‘나의 특별한 형제’. 이것은 모두 ‘가족’ 이야기다. 새로운 가족에 대한 상상은 현실이 될 수 있을까.

비혼 출산·1인 가구·동거가족
제도 밖 다양한 가족 유형 등장

건강가정기본법 개정안 추진
법명을 ‘가족정책’으로 변경
가족 정의(혼인·혈연·입양으로 이루어진)
가족해체 예방 조항 등 삭제

법무부 ‘사공일가’ TF 발족
민법상 가족 개념 재정립
미혼·비혼 입양 허용 여부
반려동물 가족 인정 등 논의




■정상가족에서 다양한 가족으로

여성가족부는 가족 정책의 방향과 과제를 제시한 ‘제4차 건강가정기본계획(안)’을 곧 확정한다. 정영애 여성가족부 장관은 올 1월 공청회에서 “가족 다양성 증가를 반영해 모든 가족이 차별없이 존중받고 정책에서 배제되지 않는 여건 조성에 초점을 두었다”고 설명했다. 비혼이나 동거가족처럼 결혼 제도 밖의 다양한 가족구성의 권리를 보장하고 가족 유형에 따른 차별을 해소하는 것이 핵심이다.

건강가정기본계획의 근거법인 건강가정기본법 개정도 함께 추진된다. 지난해 더불어민주당 남인순 의원과 같은당 정춘숙 의원이 잇따라 대표발의한 개정안은 법명의 ‘건강가정’을 가치중립적인 ‘가족정책’으로 변경하고, ‘가족’이라는 정의를 삭제하는 내용이다. ‘건강가정’이라는 용어는 2004년 제정 당시부터 ‘정상가족’ 이데올로기를 강화하고 차별을 강화할 수 있다는 이유로 논란이 됐고, 이듬해 국가인권위원회가 이미 개정을 권고했다. 특히 눈여겨 볼 대목은 ‘가족’의 정의 삭제다. 가족을 ‘혼인·혈연·입양으로 이루어진 사회의 기본단위’로 규정한 조항 전체를 들어내면 다양한 가족 유형으로 정책 대상을 확대할 수 있다.

모든 국민은 혼인과 출산의 사회적 중요성을 인식해야 한다는 ‘혼인과 출산’, 국가와 지자체의 정책 목표를 가족 유지에 둔 ‘가족해체 예방’ 조항도 삭제를 추진한다. 혼인과 출산에 대한 개인의 선택권을 인정하고, 가족 정책의 패러다임을 가족 유지에서 가족 구성원 개인을 존중하는 평등한 가족문화로 바꾸기 위해서다. ‘이혼 예방 및 이혼가정지원’을 ‘이혼 전·후 가족 지원’으로 바꾸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가족 형태에 따른 차별을 금지하고, 가족 구성원의 민주성과 평등성을 강조한 조항도 명문화된다.

실제로 헌법은 혼인과 가족생활이 존속되는 조건을 개인의 존엄과 양성 평등이라고 규정한다. 그러나 그동안 가족 정책은 가족의 유지를 지상조건으로 두면서 가정폭력이나 아동학대, 가사나 돌봄 분담의 불평등 문제 등을 제대로 해결하지 못했다.

1인 가구 정책에 대한 혼선도 여기에서 비롯됐다. 지난해 6월 정부는 기획재정부 주재의 범부처 ‘1인 가구 정책 TF’를 통해 1인 가구 중장기 정책 방향과 대응 방안을 내놓았다. 이 때 정부는 ‘취약한 1인 가구’를 ‘지원’하는 것으로 정책 대상과 목표를 분명히 했다. 1인 가구 정책이 저출산·고령화 대책과 상충될 소지가 있다는 우려를 의식한 설명이었다.

이런 인식에도 변화가 감지된다. 법무부는 최근 1인 가구의 사회적 공존을 위해 법제도를 개선하는 것을 목표로 TF ‘사공일가(사회적 공존, 1인 가구)’를 발족하고 지난 15일 정책위원회에서 중점 검토 과제를 논의했다.

5대 중점 과제에는 혈연 중심의 가족 개념에서 벗어나 사회적 인식 변화를 반영할 수 있도록 민법상 가족 개념을 다시 정립하는 것이 포함됐다. 미혼이나 비혼 가구의 입양 허용 여부도 검토 대상이다. 반려동물을 가족으로 인정할 수 있도록 동물의 법적 지위를 개선하는 내용도 논의한다. 법무부는 1인 가구 ‘지원’에만 초점을 맞춘 기존 정책을 넘어 보다 근본적인 법과 제도 개선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멀찍이 앞서가는 현실과 인식

정부의 움직임이 빨라지고 있지만 현실을 따라잡기에는 한참 늦다. 1인 가구 비중은 2019년 30.2%로, 2000년 15.5%의 배로 급증했다. 연령대별 전체 가구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보면 20대와 30대가 가장 크게 늘었고, 가구수로 보면 70대 이상 고령층이 급증했다. 1인 가구는 이미 2015년부터 4인과 2인 가구를 제치고 우리나라 가구 형태 가운데 첫 순위였다. 반대로 전형적인 가족으로 인식되던 ‘부부와 미혼자녀’ 가구는 2010년만 해도 37.0%였으나 2019년 29.8%로 줄었다. 주거, 상속, 복지 등 사회 대부분 분야 정책의 기준이 여전히 다인 가구인 것과 비교하면 정책이 사회 변화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한 지 오래다.

부산도 마찬가지다. 부산에서는 2000년 4인 이상 가구가 전체의 46.0%였지만, 2018년에는 1인 가구(29.7%)와 2인 가구(28.6%)를 더하면 전체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게 됐다. 같은 해 기준으로 한부모와 미혼자녀로 구성된 가족도 전체 가구 중에는 10.6%지만 2세대 가구만 두고 보면 네 집 중 한 집 꼴(23.7%)로 비중이 늘어난다. 혈연으로 구성되지 않은 비혈연가족도 1만 8244가구(1.3%)로, 2000년(7220가구, 0.6%)에 비해 지속적으로 늘었다. 반대로 인구 1000명당 혼인건수를 나타내는 조혼인율은 2000년 6.1%에서 2019년 4.1%로 하락했다. 같은 기간 혼인 대비 이혼 비율과 재혼 비율은 늘었다.

최근의 정책 개선 움직임은 이러한 변화를 반영해 정책의 방향을 ‘혼인과 출산’에서 넓혀서 ‘다양한 가족의 인정’으로 전환하고 이를 통해 가족의 범주를 확장하려는 노력이다.

부산여성가족개발원 김혜정 연구위원은 “기존 가족의 규정은 혼인과 출산을 하지 않는 가족, 제도 밖 가족, 가족의 해체를 경험한 가족에 대한 차별을 강화해왔고, 더이상 건강한 가족, 나아가 출산율의 성장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고 설명했다.

실제로 통계청의 ‘한국의 사회동향 2020’에 따르면 스웨덴(54.4%), 영국(48.4%), 미국(39.6%, 2018년) 등 혼외출산율이 높은 서구 국가들은 합계출산율도 높다. 반대로 한국의 혼외출산율은 OECD 국가에서 가장 낮은 수준(2019년 2.3%)이다. 남녀가 결혼을 하지 않아도 함께 살 수 있고(59.7%), 결혼하지 않고도 자녀를 가질 수 있다(30.7%)는 인식은 높아졌지만, 전통적인 가족관에 따른 차별은 현실적인 걸림돌인 것이다.

2014년 도입이 논의된 ‘생활동반자법’도 법적으로 혼인 상태가 아닌 다양한 제도 밖 가족들에게 일정한 사회 보장을 제공하자는 내용이었다. 프랑스가 자유로운 동거와 출산을 보장한 팍스(PACS·시민연대계약)을 도입해 출산율을 끌어올린 사례를 참고했다. 당시 더불어민주당 진선미 의원실에서 생활동반자법 입법을 추진한 황두영 씨는 책 ‘외롭지 않을 권리’에서 “1인 가구의 권리를 제대로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1인 가구가 아니더라도 달리 살 수 있는 방법들이 다양하게 제시되어야 한다”면서 “생활동반자법은 ‘함께 살며 서로를 돌보겠다는 자발적인 마음’을 모아서 지어내는 우리 사회의 안전망”이라고 강조했다.



■모든 가족과 개인을 대상으로

부산시도 지난해 3개 지역 건강가정지원센터에서 각각 청년, 여성, 중장년층을 대상으로 1인 가구 커뮤니티 시범사업을 진행했다. 당시 부산진구의 여성 대상 사업에 참여한 서누리 씨는 “신혼부부를 위한 정책도 중요하지만 1인 가구가 좀 더 좋은 환경에서 여유로운 삶을 영위하게 한다면 결혼이나 출산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지 않을까 한다”라면서 “1인 가구는 복지 혜택에서 비껴난 존재라고 생각했는데 1인 가구끼리 교류하는 프로그램을 통해 국가가 구성원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희망을 봤다”라고 말했다. 부산여성가족개발원은 부산시의 1인가구 종합지원계획 수립에 앞서 다양한 분야 정책의 1인 가구 영향평가 지표를 개발하기 위한 연구를 계획하고 있다.

아동단체에서 활동한 김희경 씨는 책 ‘이상한 정상가족’에서 정상가족 이데올로기의 폐해를 지적하면서 복지를 더이상 가족의 책임으로 둘 게 아니라 사회투자로서 국가가 개입하고 책임져야한다고 강조한다.

김혜정 연구위원은 “가족을 영원 불변한 공동체가 아니라 언제든 어떤 형태로든 재구성될 수 있는 생활공동체로 보고, 정책 서비스의 대상 또한 소득 중심 ‘취약계층’이라는 범주에서 보편적인 가족으로, 가족 단위에서 가족 구성원 개인에 대한 지원으로 바꿔나가야 한다”라고 말했다.

최혜규 기자 iwill@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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