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 박영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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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순 소설가

일제강점기 때 박영철이라는 자가 있었다. 그는 몰락한 양반 후예였지만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대한제국의 군인으로 한국 강제병합 이후 일본군의 고위 장교를 지냈고 전역 이후도 요직을 두루 거쳤다. 은퇴 후 기업인과 은행가로서 활동한 그의 일생은 한 마디로 호화찬란했다. 뿐만 아니라 박영철은 서화골동품 수집가로 유명했고 시문과 한학에도 조예가 깊었다.

박영철은 당시 재계 인사 중에 독서를 가장 많이 했으며 성격마저 원만했다고 한다. 조선총독부 기자단에서는 그를 아부나 청탁 같은 것도 할 줄 모를 만큼 청렴했고 과묵한 성격이었다고 평했다. 그의 됨됨이가 훌륭했다는 평이 많을수록 그의 친일 행각이 더욱 두드러져 보인다. 일본의 생활 방식을 추종하는 것만이 조선의 살 길이라는 게 박영철의 신념이었다. 그러면서 그는 조선의 서화골동품은 무척 소중하게 여겼다.

서화골동품 수집 많이 한 친일파
연암 ‘열하일기’ 등 세상에 알려

소장품들은 사후 경성제대 기증
현재 서울대박물관 기틀 다진 셈

그를 기리는 단독 전시관은 없어
친일 과오가 기증 공덕 가려버려



박영철은 조선의 귀중한 책이나 서화골동품이 흩어지는 것이 안타까워 무조건 그것들을 사 모았다고 했다. 구입 때마다 날짜, 번호, 전 소장가 이름까지 꼼꼼하게 기록하는 것도 빠뜨리지 않았다. 그의 소장품은 모두 115 점이며 <고 박영철 씨 기증 서화류 전관 목록>에 적혀 있다. 연암 박지원 책을 세상에 알리고 출간했던 이가 박영철이다. 박지원의 저 유명한 저서 <열하일기> <과농소초> 등이 박영철 소장품이었다.

박영철 나이 53세 때인 1932년 5월 17일에 17권 6책으로 간행한 박영철본 <연암집>은 국문학계와 한문학계에도 이미 잘 알려진 바다. 그럼에도 시중에 나온 연암집 서문에는 박영철은 아예 언급되지 않았다. 박영철은 죽기 전에 친일 행각을 반성했다. 유언에 따라 박영철 소장품은 그가 죽은 다음 해인 1940년에 경성제국대학교에 기증됐다. 지금의 서울대학교박물관은 박영철 기증품으로 터전이 마련됐다.

나는 재작년에 박영철 기증품을 구경하기 위해 서울대학교박물관에 갔다. 국립중앙박물관에도 유물기증자 실을 별도로 마련해 기증자와 유물을 전시하는 상설관이 있으니 서울대학교박물관에도 박영철 소장품 상설전시관 정도는 있을 줄 알았는데 없었다. 박영철 소장품은 수장고에 보관되어 있다고 했다. 수장고를 보고 싶다고 하니 직원은 담당 학예사가 출장 중이라 보여줄 수 없다는 것이었다. 박영철 소장품이 서울대학교박물관의 근간이 됐는데 어찌 그의 소장품 전시관 하나 없느냐고 하나마나한 질문을 했지만 돌아온 답은 없었다.

당시 친일 골동상은 돈 많은 일본인한테 조선의 골동품을 다 팔았다. 생각하기도 싫지만 빼어난 우리 유물들은 돈 많은 일본 소장가 손에 거의 다 들어갔다고 보면 된다. 박영철의 친일은 지탄받아 마땅하다. 그러나 그가 소장품을 모조리 대학교에 기증한 것은 후손인 우리로서는 천만다행이다. 골동계만이 아니라 문학에서도 친일 문인을 빼면 현대문학사 뼈대가 앙상해질 정도로 친일파가 많다. 한 마디로 우리나라 현대사는 친일파를 빼놓고 말할 수 없다.

친일파들의 공과(功過) 무게를 달아 그들을 기리거나 비난하자는 말이 아니다. 친일파 박영철과 서화골동품 기증자 박영철을 분리해서 평가했다면 그의 기증품이 마냥 수장고에만 보관되어 있지 않으리라는 생각을 잠시 해봤다. 다 알다시피 박물관은 고고학적 자료나 역사적 유물이나 예술품, 학술자료를 수집하고 보존하며 진열하는 곳이므로. 나는 박영철 소장품을 보러 다시 서울행 일정을 잡아야 한다는 생각과 함께 당시 일본인 손에 넘어간 그 많은 우리 문화 유산들이 어디에 가 있을지 상상하며 집으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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