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물썰물] '오빠' 그래미 품다

부산닷컴 기사퍼가기

그는 클래식 대중화에 앞장섰다. 부산문화회관을 자주 찾았던 클래식 연주자 중 한 사람이었다. 인기도 대단했다. 10여 년 전, 당시 20대 여성들이 공연장을 찾아 그를 보고 ‘오빠’를 연호했을 정도였다. 어느 때는 젊은 여성 팬들이 집중적으로 매표에 나서면서 그의 공연 좌석이 조기 매진된 적도 있었다. 실내악 그룹 앙상블 ‘디토’ 구성원으로 바이올리니스트 자니 리, 첼리스트 패트릭 지, 피아니스트 임동혁 등과 함께 공연할 때는 그의 인기가 날개를 달았다. 누군가는 그에게 클래식을 알게 해 준 사람이라고 극찬했다. 세계 정상급 실내악단 타카치 4중주단의 일원이자 세계적 비올리스트 ‘리처드 용재 오닐’을 두고 하는 얘기다.

그의 중간 이름 용재(勇才)는 ‘용기’와 ‘재능’을 의미한다. 용재 오닐은 비올리스트로는 최초로 미국 줄리아드 음악원 ‘아티스트 디플로마 프로그램’에 입학했다. 그 줄리아드 음악원 강효 교수가 용재라는 이름을 붙여 주었다. 용재 오닐이 음악가로 성장하기까지 남다른 삶이 있었다. 그의 삶을 안다면, 용기와 재능이 필요했음을 단번에 읽어 냈으리라.

용재 오닐의 삶은 비올라 선율처럼 슬프면서도 아름답다. 한국전쟁 때 고아로 미국으로 입양된 어머니에게서 태어나 아버지 얼굴도 모른 채 아일랜드계 미국인 외조부모 손에 자랐다. 그의 어머니는 어릴 적 앓았던 열병으로 지적장애를 지니고 있었다. 그런 삶이 그의 음악적 감수성에 영향을 미쳤다. 그는 외조부모의 도움으로 세계적인 비올리스트로 성장한다. 외조모가 10년간 그의 레슨을 위해서 수백km를 직접 운전하면서 뒷바라지했다고 한다. 그의 이런 가족사와 인생사는 2004년 KBS TV ‘인간극장’을 통해 소개되면서 국내에 알려졌다. 그 이후로 그의 이름 앞에 ‘아름다운 청년’이란 수식어가 따라붙었다.

20대의 그 아름다운 청년이 이젠 그래미를 품고 40대의 나이로 우리 곁에 다시 돌아왔다. 그는 엊그제 제63회 ‘그래미 어워즈’에서 베스트 클래시컬 인스트루멘털 솔로상을 받았다. 마치 방탄소년단(BTS)의 그래미상 수상 불발의 아쉬움을 달래 주기라도 하듯 말이다. 용재 오닐은 세 번째 후보 지명에서 마침내 그래미상을 거머쥐었다. 그는 수상 소감으로 “비올라에 있어 위대한 날이다”라고 했다. 우리가 그를 기억하고 있다면, 부산 팬들에게도 이날은 분명 위대한 날임이 틀림없다. 탁월한 기교, 자유로운 상상력, 깊은 한의 소리를 가진 그의 연주에 뜨거운 찬사를 보낸다. 정달식 문화부 선임기자 dosol@


당신을 위한 AI 추천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