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 칼럼] 사랑도 이름도 명예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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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희 독자부장

백기완 선생의 이름을 근 30년 만에 다시 들은 것은 그의 부고를 접하면서다. 2021년 2월 15일 오전 일찍 짤막한 1보 기사가 떴다. ‘통일운동가 백기완 선생 별세’라는 제목이 전부인 기사다. 연합뉴스는 이어 당일만 20건 가까운 기사와 영상 등을 배포했다.

연합뉴스의 2보 기사는 이랬다. ‘통일운동가 백기완 선생이 15일 별세했다. 향년 89세. 서울대병원 등에 따르면 백 선생은 이날 오전 영면했다. 1933년 황해도 은율에서 태어난 그는 1950년대부터 농민·빈민·통일·민주화운동에 매진해왔다. 지난해부터는 심장질환 등으로 수술과 병원 치료를 받아왔다.’ 한 생애는 짧은 몇 문장으로 요약됐지만, 그의 삶은 훨씬 컸다.

오래 잊었던 한 재야인사 부고 기사
어떤 삶이 참된 삶인가 일깨운 소식
사적 이익에 억지 소신 정치인 집단
몰염치한 사고는 시민 모두에 해악

백기완 선생은 ‘백 선생’이라는 애칭으로 기억한다. 전두환 통치 시절, 백 선생이 교정에서 열변을 토하고 나면, 구름처럼 모인 학생들이 거리로 뛰쳐나갔다. 연보엔 1983년 민족통일민중운동연합이라는 재야단체의 부회장이라고 적혀 있으니 80년대 초반부터 활발한 재야운동을 벌인 모양이다. 당시 연설 내용은 자세히 기억나지 않지만, 그의 한마디 한마디는 청년들의 심장에 존재한 시대적 부끄러움을 불살라버리는 강력한 소각 행위인 것은 분명했다.

시대적 상황에 대한 외면과 두려움, 안일함에 안주하려는 청년의 나약함을 검은 두루마기를 입은 백선생이 호통치며 각성시키니 연설에 감동한 청년 학생들은 손을 치켜들며 독재타도를 외쳤다.

어느새 귀밑머리가 희끗희끗해지면서, 도무지 누가 말한 것인지도 분명치 않은 경구 ‘젊은 시절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니면, 청년이 아니다(바보다). 그러나 나이가 들어서도 마르크스주의자면 어른이 아니다(더 바보다)’를 되뇌는 나이가 돼 버렸다. 영국의 현대철학자 카를 포퍼가 남긴 말이라고는 하지만, 진위가 확인되지는 않는 말인데 은근히 소시민으로 살아가는 부끄러운 현실을 다소 진정해주는 달콤한 구절인 것은 맞다. 그런 상황에 느닷없이 접한 백 선생의 부고는 오래전 잃어버린 그 무엇을 다시 찾은 느낌이었다.

기쁘고 자랑스러운 소식뿐만 아니라 궂긴 소식도 소중히 다루어야 하는 부서이다 보니, 백 선생의 부고 기사를 어떻게 써야 할지 고민이 되었다. 그러나 그 고민은 크게 오래가지 않았다. <부산일보>는 다음날 1면 등 주요 면에 시대를 관통하는 삶을 뚜렷하게 살다간 백 선생의 일생을 소개했다.

그 시대 그의 사상에 어떤 식으로든 영향을 받은 이들은 사회생활에서 최소한의 염치로 살 작정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취업과 결혼 등으로 이어지는 현실에서 그 염치를 잊고 사는 게 다반사였다. 그런데 백 선생의 이후 연대기를 살펴보면 80년대 그의 외침은 한때의 허언이 아니었고, 이전과 이후 그의 삶은 오롯이 민주주의 정신과 조국의 평화통일, 그리고 우리 사회의 약한 존재인 노동자, 비정규직을 옹호하는 것으로 이어졌다.

백 선생이 생전 마지막으로 쓴 글귀는 새로 창간하는 전태일 신문에 쓸 '노동해방 백기완'이었단다. 그의 삶은 초지일관했다.

백 선생을 인터뷰한 영상을 찾아서 보기 시작했다. 한 온라인 신문사의 출판 강연에 등장한 80대 백 선생의 목소리는 젊은 시절보다 조용해지고 목청은 좀 더 쉬었다. 그러나 곧고 바른 기운은 하나도 흐트러지지 않았다. 한 청중이 물었다. “선생님, 선생님은 평생 재야운동, 통일운동, 민주화운동을 해왔습니다. 대통령선거에 민중후보로도 출마하셨습니다. 그런데 세상은 왜 아직 달라지지 않았습니까?”라고 까칠하게.

다음 장면에서 나올 선생의 답변을 유추했다. ‘걱정 마시오, 조금씩 세상은 나아지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노력한다면 곧 더 나아질 거요’ 뭐 이런 대답이겠지 생각했다. 그러나 백 선생은 “미안합니다. 이 늙은이가, 우리 세대가 좀 더 열심히 투쟁하지 못했습니다. 죄송합니다.” 그날은 잠이 잘 오지 않았다.

부산시민 모두가(?) 원하는 가덕도신공항을 반대하는 사람들이 있다. 기후 정의 실현과 환경 파괴, 난개발을 우려해 논리적으로 반대하는 손상우 미래당 부산시장 예비후보다. 그의 논지는 일리가 있다. 결은 한참 다르지만, 김종인 비상대책위원장의 가덕신공항 추진 서명과 다르게 정작 특별법 제정 표결엔 참여하지 않거나 기권한 국민의힘 부울경 출신 국회의원 12명도 있다. 그들의 소신 또한 존중받아야 한다. 그러나 두 번 생각해도 소신은 다수의 행복과 정의, 지역 불균형 해소, 평등 의식에 바탕을 두어야 한다. 몽니는 안 된다.

평생을 올곧은 자세로 드넓은 민중의 바다에서 늘 시선은 더 아래를 바라보며 항해한 백 선생이 그래서 또 그립다.

jaehee@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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