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트북 단상] 누가 국민의 '역린'을 건드렸는가

부산닷컴 기사퍼가기

권상국 사회부 경찰팀장

‘역린(逆鱗)’이란 말, 들어보셨는지요? 용의 몸에 붙어있는 81개의 비늘 중에 유일하게 거꾸로 자리 잡은 비늘이랍니다. 관대한 용도 역린을 건드린 자는 반드시 물어 죽인다고 하네요.

자유민주주의 국가인 대한민국에도 역린은 있습니다. 입시와 군대, 부동산은 이른바 ‘대한민국 3대 역린’입니다. 이 셋 중 하나만 연루되어도 3대가 조리돌림을 면하기 어렵지요. 역린이란 비유가 과언은 아닙니다.

한국토지주택공사(LH)의 부동산 투기 후폭풍이 전국을 뒤흔들고 있습니다. 신도시 사업지 일원마다 LH 직원이 차명으로 사들인 땅이 부지기수라는 풍문은 또 다른 풍문이 보태져 이제 광풍이 됐습니다.

특별수사본부까지 차린 경찰은 LH 사태를 계기로 수사능력에 대한 세간의 우려를 불식시키겠다며 팔을 걷었습니다.

한데, 한시라도 빨리 투기 대상자를 가려내야 하는 이 시점에 LH 수뇌부는 난데없이 직장인 익명 커뮤니티를 물고 늘어집니다. LH 사장 직무대행이 “직장인 익명 커뮤니티 ‘블라인드’에 ‘꼬우면 니들도 이직하던가’라는 글을 올린 직원을 색출해달라”며 수사기관에 고발장을 제출했다는 겁니다. 내부 직원임이 밝혀지면 즉각 파면하고, 민사상 손해배상을 청구할 거랍니다.

대체 어떤 글이었길래 그런가 싶어 뉴스를 들여다봤습니다. 이 양반의 빈정거리는 솜씨는 하나의 일가를 이뤘더군요. 이달 초 민변과 참여연대가 폭로한 부동산 투기 사태를 ‘내부에서는 신경도 안 쓰는 일’ ‘우리 회사만의 혜택이자 복지’라고 웃어넘깁니다. ‘아무리 열폭해도 난 열심히 차명으로 투기하면서 정년까지 꿀 빨면서 다니련다’며 호기를 부리던 그는 ‘꼬우면 이직하던가’로 게시물을 마무리했습니다.

이 짧은 익명의 게시물 하나가 회자되면서 일파만파로 LH 사태를 키웠습니다. 결국 국무총리 입에서 발본색원하겠다는 말까지 나왔습지요. 이번 사태에 군불을 화끈하게 땐 이 양반은 부동산 열패감에 사로잡힌 직장인 사이에서 ‘블라인드 열사’라 불립니다.

그러나 빈정거림은 빈정거림일 뿐입니다. 안 들리는 곳에서는 나랏님 욕도 한다지 않습니까. 전국의 신도시 사업 대상지가 부동산 투기 의혹에 휩싸였고, 직원 2명이 극단적인 선택을 했습니다. 이 시점에 와서 게시물 하나 올린 사람 찾아내 달라는 건 이치에 맞지 않는 일입니다.

익명 커뮤니티까지 뒤져가며 명예를 되찾겠다는 LH의 엉뚱한 고집에 국민은 과연 어떤 반응을 보일까요? 누가 뭐래도 지금은 LH가 수사기관에 협조해 그간의 부정행위를 뿌리 뽑는데 조력해도 모자랄 시점이 아닙니까.

과연 현시점에서 국민 대다수가 진실로 그 정체를 알고 싶어 하는 LH 직원은 누구일까요? 내부 정보를 빼돌려 전국 곳곳에 부동산 투기를 한 직원일까요, 아니면 하라는 일은 안하고 익명 커뮤니티를 들락거리며 글을 쓴 직원일까요.

한순간에 비위 행위자 소굴로 전락했다는 데 대한 LH의 박탈감은 이해합니다. 그러나 그 박탈감이 사회에 발을 내딛기도 전에 내 집 마련의 꿈을 접었다는 이 땅의 청년들이 느낀 또 한 번의 패배감만 할까요. LH는 누가 선거철을 앞두고 청와대의 ‘역린’을 건드렸는지 찾아낼 게 아니라 누가 국민의 ‘역린’을 건드렸는지부터 찾아내야 합니다. ksk@


당신을 위한 AI 추천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