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택광의 지발도네(Zibaldone)] 윤여정 현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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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희대 글로벌커뮤니케이션학부 교수

정이삭 감독의 영화 ‘미나리’가 드디어 국내에 개봉했고, 예상했던 대로 이곳저곳에서 호평이 들려오고 있다. 선댄스 영화제 심사위원 대상을 받을 때부터 이미 예견된 결과이긴 했지만 ‘아카데미 전초전’이라고 할 수 있는 골든 글로브상까지 거머쥐면서 ‘미나리’는 미국 내에서 확고하게 입지를 굳혔다. 그러나 이런 ‘미나리’의 입지는 상당히 흥미로운 과정의 결과이다. 엄연히 미국 감독이 만든 미국 영화임에도 이 영화는 골든 글로브에서 ‘외국어 영화’로 상을 받았기 때문이다. 대사의 50% 이상이 외국어일 경우에 외국어 영화로 취급한다는 시대착오적인 골든 글로브의 규정이 오히려 ‘미나리’에 대한 관심을 더욱 촉발한 측면이 있다.

조연에 쏟아진 미국 언론의 이례적 찬사
잃어버린 ‘아메리칸 드림’의 원형을 본 것
더 이상 백인 문화에 동화되지 않으려는
아시아계 이민자들의 정체성에 큰 울림

이런 과정은 우연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필연적인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 영화를 두고 대체로 ‘아메리칸 드림’을 언급하고 있지만, 내가 보기에 이 영화는 아주 적확하게 ‘아시안 아메리칸(Asian American)’의 현실을 보여 주는 쪽에 가깝다. 다분히 자전적인 내용이 녹아 있기 때문에 그렇기도 하겠지만, 서사의 메시지를 넘어선 제작과 수용이라는 지극히 구체적인 현실의 차원에서 이미 이 영화는 ‘아시안 아메리칸’의 애환을 육화한 형식 자체가 되어 버렸다. 이 형식의 논리를 체현한 배우가 바로 극 중 ‘순자’의 역할을 맡은 윤여정이다.

어떤 영화든 작품성에 의문이 제기되지 않는 상황에서 주연 배우보다도 조연 배우에 더 많은 관심이 쏠리는 경우는 드물다. 순자는 영화 ‘미나리’에서 미나리를 미국으로 가져오는 역할을 맡는다. 이런 설정에서 알 수 있듯이 미나리는 단순한 채소의 이름에 지나지 않는 것이 아니라, 한국인 이민자 자체를 상징한다. 주인공 제이콥이 한국 음식에 들어가는 채소를 재배해서 납품하려 한다는 설정과 이 미나리의 상징성은 서로 교차한다. 미나리는 제이콥이 키우려는 작물에 속하지도 않는다. 순자 역시 제이콥의 아내 모니카가 데려온 장모이지만, 사실상 제이콥의 미국 정착에 큰 도움을 주지 못하고 오히려 그의 성공을 결정적으로 망쳐 버린다.

윤여정의 조연은 결코 작은 비중이 아니다. 그럼에도 영화 개봉 후에 그에게 쏟아지는 관심과 찬사는 이례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벌써 윤여정에게 수여된 상만 해도 30개가 넘는다. 윤여정 자신이 한 인터뷰에서 “나라가 크니 상도 많은 것 같다”는 유머러스한 겸손을 표명했지만, 미국 내 영화계의 여론은 의미심장하다. 윤여정이 한국 배우 최초로 아카데미의 오스카상을 수상하지 못한다고 해도 이미 이런 관심 자체가 그의 존재감을 한껏 부각시킨 것이다.

ABC 뉴스 아침 방송 인터뷰 말미에 진행자는 윤여정에게 “앞으로 더 자주 당신의 이름을 거론하게 될 것”이라고 했는데, 이 또한 빈말이 아니라는 생각이다. 이런 윤여정의 인기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그 실마리는 ‘미나리’에 대한 한국계 미국 배우 샌드라 오의 인터뷰에서 찾을 수 있다. 샌드라 오는 이 영화를 보면서 자신의 어머니가 생각났다고 진술했다. “아 우리 엄마의 피부가 저랬지”라고 기억을 떠올렸다는 것이다. 이 진술에서 ‘미나리’에 대한 관심의 정체가 고스란히 드러난다. 무엇보다도 이 영화는 미국에서 고단한 삶을 살아냈던 한국계 미국 이민자들의 슬픔을 치유하는 치료제의 기능을 했다.

여기에서 윤여정이 연기한 순자의 존재가 의미를 획득한다. 순자는 곧 윤여정 자신이기도 했다. 윤여정 역시 한국인으로서 미국에서 거주했던 경험을 가지고 있다. 게다가 그의 영어는 한국인으로서 미국에 정착하기 위한 ‘미나리’ 같은 무엇이었다. 그에게 그토록 많이 미국의 언론들이 인터뷰를 요청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의 언어에서 그들은 한국계 미국 이민자들의 정체성을 발견했던 것이다. 스티븐 연이나 한예리가 아닌, 윤여정에게서 그 미국의 매체들이 찾아낸 것은 무엇이었을까. 나는 그 윤여정의 언어야말로 그들이 잃어버린 ‘아메리칸 드림’의 요체였다고 본다.

윤여정으로 인해 ‘미나리’는 허구에 그치지 않고 현실로 거듭난다. ‘윤여정 현상’을 인정한다면, 그 현상은 곧 한국계 미국 이민자들의 목소리를 들려주는 허구와 현실 사이의 스피커로서 배우이자 자연인으로서 윤여정이 존재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라고 본다. 지난 몇 년간 미국 내 아시아계 이민자들은 더 이상 백인 문화에 자신들을 동화시킴으로써 정체성을 정립하지 않게 되었다. 이런 변화의 와중에 ‘미나리’가 출현한 것이다. 이 영화의 중핵에 바로 윤여정이라는 아메리칸 드림의 원형이 자리 잡고 있는데, 이처럼 오직 ‘상처를 낸 창(槍)’만이 그 상처를 치유할 수 있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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