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을 여는 시] 깊이의 순수 / 허만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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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 안에 고여 있는 시간이 광물질에 동화하여 침묵하고 있을 때, 고뇌 안에 쌓여 있는 슬픔은 비티아즈 해연 깊이가 된다. 빛이 뚫지 못하는 투명한 물의 두께가 만드는 어둠의 깊이에서, 생명은 스스로 형광을 만들며, 암흑에 저항한다. 에베레스트 산정에서 공기의 희박을 느끼고 쓰러진 인간이 높이를 깨닫듯, 조여 드는 어둠의 농도로 최후의 숨가쁨을 느끼는 물의 깊이. 밤하늘 시름 하나, 별똥별 무게로 바다 밑 바닥에 가라앉는 깊이. 슬픔과 고뇌를 초월한 명석한 깊이의 순수.
-허만하 시집 중에서-

삶의 생태학적 의미와 분석에 길들여진 시인들이 시 작업의 의미 없음에 불현듯 빠져들 때, 그때 허만하 시인의 시를 읽어야 한다. 언어 이전의 존재, 생명 이전의 존재들에게 언어로 다가서는 시인의 고독한 정신 작업을 읽고 나면, 수직으로 떨어지는 시인의 자의식에 전율을 느끼게 된다. ‘모든 존재는 시간 속에서 가능해진다’라는 하이데거의 명제마저도 은유의 일부로 전락되는 시인의 절대적 존재를 향한 외침은 때론 시간 이전으로 때론 공간 이전으로 향하고 있으며, 니체의 극복되어야 할 인간으로서의 초인정신을 떠올릴 만큼 강렬한 시 정신은, 시 작업이 정신의 변방에서 얼마나 힘들게 일어나는 작업인가를 깨닫게 해준다.

30년간의 병리의학자로서의 삶을 마치고, 1999년에 펴낸 시인의 30년 만의 두 번째 시집 이후 봇물 터지듯 나온 그의 정신 작업들은 한국 시단의 평자들에게 두려움과 황홀감을 선사하고 있다. 1974년 부산시인협회가 창설되는 데 일조하며 초대 회장을 지내기도 한 시인의 다음 시구를 부산의 시인들에게 전하고 싶다. ‘사람은 풍경을 공유할 수 있지만 심연은 나누어 가질 수 없다.’ 이규열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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