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물썰물] 이라크에 간 교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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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상 이슬람과 가톨릭 세력의 상호 관계에서 가장 드라마틱한 사건을 꼽는다면 단연 십자군 전쟁을 빼놓을 수 없다. 교황을 중심으로 한 로마 가톨릭 세력이 이슬람을 상대로 성지인 예루살렘을 탈환하기 위해 시작한 십자군 전쟁은 얽히고설킨 양 세력의 알력과 반목을 상징적으로 보여 준다.

약 270년간 총 9번에 걸쳐 진행됐던 출정은 1차 때만 잠시 목적을 달성했을 뿐 나머지는 별다른 성과 없이 약탈과 피로 물든 침략 전쟁으로 끝났다. 이 때문에 이슬람권에서는 이를 비종교적인 데다 반인륜적이며 야만적인 전쟁으로 꼽는다. 유럽의 의도와 달리 이슬람권 전체가 받은 충격도 아주 미미한 정도였다고 한다.

이후 십자군 전쟁은 용어 그 자체만으로 이슬람과 유럽 세력의 갈등을 말해 주는 표현이 됐다. 2003년 3월 당시 미국 부시 대통령은 이라크와의 전쟁을 놓고 ‘십자군 전쟁’ 운운하다 곤욕을 치렀고, 오사마 빈 라덴도 서구에 대한 테러를 십자군 전쟁에 대한 복수로 포장하며 이를 호도했다. 양 세력 사이의 뿌리 깊은 불신과 반목을 보여 주는 장면이 아닐 수 없다.

양 세력의 기반인 종교적 차원에서 이슬람과 가톨릭 간 교류와 소통은 더욱더 쉽지 않았다. 현대에 들어와서도 복잡한 국제 정세 등이 발목을 잡기 일쑤였다. 그런데 21세기 전후로 종교 간 화해와 평화에 대한 기대가 고조되면서 가톨릭 최고 지도자인 교황의 역사적인 중동 방문이 시도되기 시작했다. 성 요한 바오르 2세 교황은 1999년 많은 반대를 무릅쓰고 아브라함의 고향인 이라크 칼데아의 우르(Ur) 지역으로 순례를 계획했다. 그러나 성사 일보 직전 이라크 측의 반대로 무산됐다.

교황의 중동 방문은 2013년 즉위한 현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결국 결실을 보았다. 이슬람 종교 지도자와의 접촉을 꾸준히 강화하던 프란치스코 교황이 지난 5일(현지 시간) 가톨릭 2000여 년 역사상 처음 이라크 땅을 밟았다. 만남 자체만으로도 큰 의미를 지니는 시아파 최고 지도자와의 회동을 비롯해 유대교, 가톨릭, 이슬람 3대 종교의 선조인 아브라함의 고향 우르(Ur)도 찾았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이번 방문을 통해 “적대와 극단주의, 폭력은 신앙에 대한 배신”이라는 말로 21세기 인류에게 공존의 메시지를 남겼다. 코로나19 장기화로 배제와 혐오의 기운이 그 어느 때보다 높은 이 시기에 인류가 새기고 음미해야 할 깊은 울림이 아닐 수 없다.

곽명섭 논설위원 kms01@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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