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혜영의 시인의 서재] 우울증을 앓는 튤립과 자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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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시와사상’ 편집위원

영국인들은 습기에 찬 겨울이 지나고 봄이 오면 온갖 꽃들로 정원을 가꾼다. 특히 구근에서 피어나는 봄꽃들은 황홀한데, 그중에서 튤립은 화려하면서 품격이 있다. 꽃봉오리가 올라올 때의 청순한 자태를 보면 가슴이 설렌다. 활짝 피었을 때는 이국적인 아름다움을 선사한다. 그러나 꽃이 질 때는 그 화려한 꽃잎이 허무하게 툭, 떨어져 버린다. 마치 꽃이 자살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작년 11월에 한 후배로부터 튤립 구근 열 개를 선물 받았다. 튤립 구근은 양파보다 작고 곰팡이에 약한 편이다. 가을에 흙에서 캐내 공기가 잘 통하는 망사에 담아 그늘진 곳에 보관한다. 그리고 튤립은 영하에 가까운 차가운 온도에서 겨울을 나야 봄에 싹이 나 꽃을 피운다. 베란다 그늘에 보관한 구근의 갈색 껍질을 벗기고 토분에 심었다. 곰팡이가 핀 것은 락스를 엷게 희석한 물에 소독해서 말린 후에 심었다.

화려한 꽃잎, 질 때는 허무한 추락
황홀한 죽음 연상시켜 여러 시의 소재로
코로나19로 자살 충동 늘어 걱정
자신을 긍정하는 내면의 힘 키워야

튤립 구근을 화분 세 개에 나누어 심고 기다렸다. 집안이 따스한 편이라 싹이 올라와 아침마다 들여다보았다. 구근을 조금 깊게 심어야 했는데 대충 심었더니 문제가 생겼다. 우선 화분에 물이 잘 빠지지 않는지 하나 둘 곰팡이가 생겼다. 분갈이를 하기도 쉽지 않아 그냥 두었더니 세 그루는 죽었다. 이상하게도 싹이 올라왔는데 그 옆에 다른 구근이 생기면서 또 싹이 올라오더니, 먼저 나온 싹은 시들어 버렸다.

튤립은 황홀한 죽음을 연상시키지만 거품의 이미지도 있다. 17세기 유럽에서 금융 중심지의 역할을 했던 네덜란드에서 ‘튤립 파동’(Tulip Mania·1633~1635년)이 일어났다. 오스만 제국에서 들여왔던 튤립은 식물 애호가나 귀족 계층이 선호하는 식물이 되어 가격이 엄청 치솟았다. 여러 단계의 유통업자들의 손을 거치며 대표적인 투기 상품으로 변한 것이다. 튤립 구근 한 개의 가격이 집 한 채의 그것과 맞먹을 정도까지 거품이 극에 달했다. 거품은 생겨나면 꺼지기 마련이듯, 거품 붕괴 후에 네덜란드의 경제는 활력을 잃게 되었고 발 빠른 사람들은 미국으로 이주하였다.

튤립이 질 때면 미국의 여성 시인 실비아 플라스(Sylvia Plath)가 떠오른다. 그녀의 남편은 영국의 계관시인인 테드 휴즈(Ted Hughes)이다. 휴즈의 외도로 이혼을 하고 생활고를 겪던 그녀는 서른한 살의 나이에 가스 오븐에 머리를 넣고 자살한다. 몇 년이 지난 후 휴즈의 동거인이었던 알렉산드라 위빌(Alexandra Wevill) 역시 딸 슈라(shura)와 함께 똑같은 방식으로 자살한다. 두 여인과 딸을 같은 방식으로 잃은 휴즈는 얼마나 참혹했을까.

어릴 때부터 우울증을 앓아 여러 차례 자살 시도를 했던 플라스의 연약한 심리 상태는 ‘튤립(Tulips)’에 잘 드러난다. 입원한 병실에 꽂힌 튤립을 보고 쓴 시이다. ‘튤립은 우선 너무 빨갛죠. 튤립이 나를 아프게 해요/ 포장지를 통해 튤립이 조용히 숨 쉬는 소리를 난 들을 수 있어요./ 흰 기저귀를 찬 성가신 아이처럼./ 튤립의 빨간색이 내 상처에 말을 걸어요, 그것은 잘 어울려요.’ 이런 구절에서 엿보이듯 육아를 담당한 여성 시인의 고단한 일상이 은연중에 시에 담겨 있다. 그녀는 병실에 누워 붉은 튤립에게 자신의 상처를 투사한다. 죽음 충동에 시달리는 우울증에는 미묘하게 작동하는 공격성이 있다. 불안한 주체의 분노가 타자를 향하지 못한 채 자신에게로 향하는 것이다. 자살은 또 다른 자살을 불러오듯, 2009년에는 그들의 아들인 니콜라스 휴즈마저 우울증으로 자살했다.

코로나 사태로 말미암아 심리적 곤경을 호소하는 사람들이 많다. 자신의 억압된 감정을 타자에게 토로하지 못한 채 혼자 감당하다 극단적 선택을 하는 사례가 한국에서 증가하고 있다. 특히 공개적으로 수치를 당할 일이 두려워 자살을 감행한 정치인이나 고위 관료들을 생각하면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안상영 부산시장, 노무현 대통령, 노회찬 국회의원, 박원순 서울시장 등등의 우울한 초상화가 떠오른다. 그들은 개인적인 결함이 있었지만, 위선자로 낙인찍히는 공포를 스스로 감당하지 못했을 것이다. 타자의 잘못을 과도하게 여론을 통해 몰아붙이는 관행은 시정할 필요가 있다.

사실 인간은 불완전한 존재이다. 언제든 실수와 잘못을 저지를 수 있고, 또한 그것을 아파하는 나약한 생명체이다. 미래는 불확실하고 그 어디에도 안전핀이 없는 것만 같다. 불안과 두려움을 양분 삼아 자라는 것이 우울증이다. 코로나 블루가 번지는 상황에서 내면에 따스한 햇살을 비추어 줄 필요가 있다. ‘당신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존재임을 잊지 마세요. 당신 입술에 번지는 미소가 우주보다 더 찬란해요. 당신을 스스로 따스하게 안아주는 봄날이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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