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신익의 참살이 인문학] 전문직 면허의 시민 통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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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대 치의학전문대학원 교수

나는 전직 치과의사다. 대학을 졸업하고 국가시험을 거쳐 보건복지부 장관이 주는 면허를 받았으니 치과의사고 그 면허가 허용한 진료 활동을 하지 않은 지가 17년이나 되었으니 ‘전직’이다. 3년마다 하게 되어 있는 의료인 신고도 하지 않았고 보수교육도 받지 않았으니 그 면허장은 그저 종이 쪼가리일 뿐이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의료 관련 법령을 위반하는 죄를 저질러 금고 이상의 형을 선고받지 않고서는,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는 이 면허를 취소할 방법이 없다. 심지어 성폭력을 저지른 전과자라도 의과, 치과, 한의과, 간호 대학을 졸업하고 해당 시험에 합격하기만 하면 의료인이 될 수 있으며 그 면허를 박탈할 법적 장치도 없다.

현 의료법 일제의 의사규칙에 뿌리
환자 대중이 제어할 수 없는 구조
전문직 면허 망나니 칼 돼선 안 돼

우리나라에서 의료인이라면 누구라도 자신이 속한 종별 의료인 단체(의사협회 등)의 회원이 되어 비싼 회비를 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협회는 회원의 자격을 제한하거나 박탈할 수 있다. 매년 협회가 주관하는 보수교육을 이수하는 것도 의료인의 의무 중 하나다. 나는 17년 동안 회비를 내지도 보수교육을 받지도 않아 회원의 권리를 행사할 수 없지만, 협회를 탈퇴하거나 면허를 반납할 수는 없다. 좀비 면허인 셈이다. 의료인이 될 학생들에게 윤리와 인문학을 가르치지만, 협회의 결정에 따라, 치과의사를 대상으로 하는 보수교육의 강사는 될 수가 없다. 회비를 내지 않아서란다.

첫 단추가 잘못 끼워진 의료법과 그렇게 굳어진 관행 때문이다. 국가는 면허라는 권력을 쥐고 그 권력의 일부를 협회에 나눠 주는 방식으로 전문가 집단을 관리해 왔다. 이 법은 1913년 일제가 제정한 의사규칙에 그 뿌리가 있으며 권위주의 정권의 입맛에 잘 맞는 제도였다. 협회는 정권과 친한 사람을 회장으로 뽑아 적당히 협력하고 타협하면서 직업의 이익을 지켜 왔다. 봉사의 대상인 대중이 아닌 권력과 친할 수밖에 없는 구조다. 그리고 이 구조와 관행은 국민 대중이 권력을 끌어내리는 세상에도 크게 변하지 않았다. 정권과의 관계는 협력이 아닌 투쟁으로 바뀌었지만, 이해 당사자인 환자 대중이 끼어들 틈은 여전히 없다.

자신들의 이익을 위한 자율 조직으로 출발해 국가와의 타협을 통해 자율 통제권을 확보해 온 서양의 전문직과는 출발부터 달랐다. 서양의 의료인은 직종별로 통일된 조직에 가입하지 않아도 된다. 자유롭게 다양한 성격의 단체에 가입해 활동하면 그만이다. 의료의 고귀한 이념을 지키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단체도 있고 의료인의 권익 보호가 최우선인 노동조합도 있다. 의료인의 면허는 반관반민의 성격을 갖는 의료위원회에서 관리한다. 영국의 경우 이 위원회가 예비 의료인의 교육부터 면허의 부여와 사후 관리까지 모든 자격을 종합적으로 관장한다. 성추행 등 주요 범죄를 저지른 사람의 면허는 법이 아닌 위원회의 결정으로 박탈되거나 제한된다. 그리고 그 내용은 모두 홈페이지에 공개된다. 처음에는 위원 대부분이 해당 직종의 의료인이었지만, 점차 비의료인의 비중이 높아지는 추세다. 국가와의 협상으로 자율권을 확보한 전문직 단체가 이제는 점차 시민 통제를 받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이다. 법 규정이 아닌 공급자와 소비자의 협상과 조정으로 문제를 풀어 나가는 시스템이다.

우리나라에서는 면허 관리의 거의 모든 사항이 법으로 정해져 있어서, 의료인 단체는 봉사의 대상인 대중을 설득하고 협상할 필요가 없다. 정치권과 싸워 입법에 성공하기만 하면 되기 때문이다. 주로 강력한 투쟁을 주장하는 강경파가 회장에 당선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의대의 정원을 늘리고 중대 범죄를 저지른 의료인의 면허를 제한하는 등 환자 대중의 이익과 안전에 직결되는 정책을 둘러싼 논쟁도 정치권과 의사 단체의 싸움으로 환원된다. 환자 대중의 통제는커녕 그들을 대변할 구조조차 없는 것이다.

국민의 건강과 안전을 위해 범죄자의 의사 면허를 취소할 수 있게 하는 의료법 개정안을, 바로 그 환자의 안전을 볼모 삼아 막아 나서는 의사협회가 있을 수 있는 것도, 직접 이해당사자인 환자의 목소리를 귀담아들을 필요가 없다고 믿기 때문이다. 우리는 시민의 힘으로 대통령도 끌어내린 나라에 살지만 정작 우리의 일상을 지배하는 전문가를 통제할 힘과 제도는 가지지 못했다.

이제는 법과 정치가 아니라 주권자인 시민이 나서야 할 때다. 그리하여 종이 쪼가리일 뿐인 나의 면허와 국민 건강과 안전을 해치는 죄를 지은 전문직의 면허를 정지시킬 수 있어야 한다. 그리하여 국민을 위해 쓰라고 준 칼을 함부로 휘두르지 못하게 해야 한다. 전문직의 면허와 자격은 국민의 인격과 몸을 지키는 칼이어야지 그 인격과 몸을 해하는 망나니의 칼이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검사가 휘두르는 권력의 칼이든 의사의 수술칼이든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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