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혜영의 시인의 서재] 백조를 노래한 시인, 예이츠의 첫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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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시와사상' 편집위원

새해에 신문을 뒤적이다 러시아 한인 2세이며 최초의 한인 여성 사회주의자였던 알렉산드라 페트로브나 김(1885~1918)에 관한 기사를 읽었다. 한국 이름은 김수라이다. 흑백 사진 속의 그녀는 우아한 백조를 연상시켰다. 연해주에서 조선인과 중국인들이 노동 착취를 당하는 현실을 보고 그들의 인권을 위해 투쟁했다. 그녀는 민족 해방과 사회주의 혁명을 지지하는 모임에 가입해 활동하다 체포되어 총살을 당했다. 그녀를 찍은 사진의 배경은 아래쪽이 검은데 내 마음속에는 붉은 칸나가 타오르는 것 같았다.

백조로 변신해 사랑의 품에 안기는 제우스
신화는 물론 수많은 예술작품의 모티브
강한 남성적 힘만으론 성취에 닿을 수 없어
연약함에의 공감, 우리 정치도 그러해야

김수라의 열정적 삶을 생각하다 문득 아일랜드의 독립운동가였던 모드 곤이 떠올랐다. 그녀는 아일랜드의 시인 예이츠의 첫사랑이었다. 감성이 풍부한 예이츠는 강인한 아름다움을 지닌 그녀였기에 더 매혹된 것은 아닐까. 아마 모드 곤은 나약해 보이는 예이츠가 마음에 들지 않았을 것이다. 예이츠의 시에는 이루지 못한 사랑에 대한 시들이 우아한 이미지로 묘사된다.

그 가운데 내 마음에 남아 있는 시는 ‘쿨 호수의 백조’이다. 예이츠의 후견인으로 그와 친분을 나눈 그레고리 부인의 저택에 쿨 호수가 있었다. 그곳을 떠다니는 백조의 우아한 몸짓에서 모드 곤을 연상한다. 마지막 연에서 그 아름다운 백조들이 문득 사라져 버리는 상황을 상상한다. ‘그런데 지금 백조들은 고요히 물 위로 떠돌고 있다/ 신비로이, 아름답게/ 어느 등심초 사이에서 그들은 둥지를 틀고/ 어느 호숫가 혹은 연못가에서/ 그들은 사람들의 눈을 기쁘게 하고 있을까? 내가 어느 날 깨어나/ 그들이 날아가 버린 것을 발견했을 때.’ 시는 이렇게 끝을 맺는데, 그토록 아름다웠던 첫사랑도 사라질 수 있음을 암시한다.

백조를 보면, 그리스 로마 신화에 나오는 제우스와 레다가 연상된다. 레다는 아이톨리아의 왕 테스티우스의 딸이며 스파르타의 왕인 틴다레오스의 아내이다. 제우스는 유부녀인 레다의 아름다움에 반했다. 그녀와의 교합을 노리던 제우스는 독수리에게 쫓기는 백조로 변해 레다의 품에 안겼고 그녀와 관계를 가졌다. 레다가 낳은 4명의 쌍둥이는 헬레네, 클리타임네스트라, 카스토르, 폴리데우케스이다. 서사시인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에 나오는 헬레네는 파리스 왕자와 사랑의 도피를 감행한 여인이다.

제우스는 사랑에 빠지면 소, 뱀, 황금빛 소나기 등으로 변신하고 접근해 교합에 성공하는 바람둥이다. 제우스 신화는 남성이 사랑에 빠지면 물불을 안 가릴 정도로 비이성적 존재가 될 수 있음을 보여 준다. 심지어 백조로 변해 기어이 레다의 품에 안겨 성교를 할 정도의 사랑꾼이다. 그런 제우스에게 사랑에 대한 책임은 별로 부각되지 않는다. 그냥 성행위를 추구할 뿐이고 쟁취하면 그만이다. 그리스 신화에 가부장적인 요소가 내재해 있음을 알 수 있다. 남성의 성적 향유에 대한 관대한 시선도 감지된다. 그러나 그리스 신화는 상당히 인간적이어서 공감이 간다. 사람이 이성만으로 살 수 없다는 것을 방증하는 것 같다. 열정의 무모함과 착오, 인간이 소유한 여러 겹의 감정을 신화 속 인물에게서 발견한다.

레다와 백조의 전설은 고대로부터 수많은 예술작품에서 모티브로 채택되었고 특히 르네상스 시대에 널리 활용되었다. 백조가 독수리에게 쫓기는 상황을 연출해 사랑하는 여인의 품에 안기는 행위는 구애의 마법 같다. 남성이 여성에게 접근할 때 용감하고 강한 이미지만 있으면 성공할 것 같은데 그렇지 않다. 나약한 척 여성의 모성에 은근히 호소할 수 있어야 사랑의 결실을 쉽게 맺을 수 있다. 강한 남자만이 살아남는 사회적 통념에 대해 제우스는 양념 같은 조언을 하고 있는 셈이다. 때로는 약한 모습을 보이는 것이 생존이나 사랑에 있어 더 이롭다. 타자들의 시기나 질투의 감정을 약화시키면서 연민이라는 공감대를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것은 정치의 미학과도 닿아 있다.

혁명의 열정도 그래야 되지 않을까. 새로운 세계를 꿈꾸면서 혁신을 추구하지만 그 과정에서 드러나는 미숙함과 실패를 목도하게 된다. 현 정부가 집값을 잡겠다고 규제를 중심으로 정책을 편 것이 오히려 집값에 날개를 달아 주는 형국이 되었다. 전세 기한을 2년에서 4년으로 확장한 것이 실패의 근본 원인이다. 잘못된 정책일 경우 정부의 위신이 상하고 비판을 받을지라도 신속히 시정하는 용기가 필요하다. 아무리 좋은 개혁일지라도 자유를 속박하는 것은 혁명의 정신이 아니다. 우아한 백조는 물 밑에서 쉼 없이 물갈퀴를 젓는다. 서울에는 폭설이 내렸다는데 쿨 호숫가에서 노닐던 백조들은 어디로 날아갔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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