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라우마 앓다 먼저 간 남편, 순직 인정까지 5년 걸렸다

부산닷컴 기사퍼가기



이현실(47) 씨는 아직도 남편이 세상을 떠난 2015년 4월 그날이 잊히지 않는다. 경남 창원소방서 소속 구급대원이었던 남편은 그날도 “죽고 싶다. 나를 놔 달라”며 밤새 술을 마셨다. 괴로워하는 남편을 부둥켜안고 “살아만 달라”며 애원했다. 아침이 되어서야 지쳐 잠든 남편이 편히 잠을 잘 수 있도록 잠깐 자리를 비웠던 게 이 씨에겐 아직도 후회로 남는다. 남편은 그날, 방 안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남편은 2009년쯤부터 극심한 불면증에 시달렸다. 눈을 감으면 자신이 처음 수습했던 그 시신의 처참한 모습이 떠오른다며 불안을 호소했다. 겨우 잠이 들면 베개가 다 젖도록 땀을 흘리다가는 큰소리를 지르며 깨기 일쑤였다. 특히 아이가 사고당한 현장에 출동한 날에는, 항상 “아이들 잘 있느냐”며 몇 번이고 전화를 걸어왔다. 남편과 함께 찾아간 병원에서 남편은 공황장애와 우울증 진단을 받았다.

창원소방서 구급 업무 소방관
참혹한 사고현장 고통 우울증 진단
2015년에 자택서 극단적 선택
정부, 순직 신청 두 번이나 퇴짜

전업주부로 5형제 키우는 아내
남편 동료 도움으로 소송 끝 승소




남편의 고통은 계속됐지만, 가끔 호전되는 듯이 보이기도 했다. 장난기 많던 옛 모습이 보이기도 해서, 이 씨는 모든 게 괜찮아질 줄 알았다. 2013년엔 다섯째도 생겼고, 2014년엔 승진도 했다. 승진과 함께 남편은 그토록 힘들어하던 구급 업무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러나, 응급구조사자격증을 보유한 남편은 6개월 만에 다시 구급대원으로 복귀해야 했다. 남편은 또다시 극심한 스트레스를 호소하다, 복귀한 지 두 달 만에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당시 전업주부로 자녀 다섯을 키우고 있던 이 씨는 눈앞이 캄캄했다. 순직유족급여를 신청했지만, 인사혁신처는 ‘부지급 처분’을 내렸다. ‘고인의 사망과 공무의 상당한 인과관계가 인정되지 않는다’는 것이 이유였다. 게다가 인사혁신처는 남편에게 채무가 있었던 점 등을 들어, 자살의 계기가 개인적인 이유로 추정된다고 결론 내렸다. 재심을 신청했지만,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다.

이 씨에게 소송은 꿈같은 일이었다. 일정한 소득도 없던 그가 수백만 원의 소송비를 마련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때, 남편의 동료들이 발 벗고 나섰다. 창원소방본부 동료들은 소송비를 모으고, 남편의 공무상 스트레스가 얼마나 컸는지 앞장서서 증언했다. 이들의 동료애 덕에 6명의 변호인단도 꾸려졌다.

그리고 올해 6월, 법원에서 기쁜 소식이 들려왔다. 서울행정법원은 이 씨가 인사혁신처장을 상대로 낸 순직유족급여 부지급 처분 취소 소송에서 원고 승소 판결을 내렸다는 것. 남편이 세상을 떠난 지 5년 만이었다.

이 씨는 이 판결이 자신과 마찬가지로 순직 판정을 받지 못한 자살 소방관 유가족에게 희망이 되길 바란다. 소방청에 따르면 지난 2015년부터 극단적 선택을 한 소방관만 62명에 달한다. 이들 중 대다수가 ‘공무상 사망’으로 보기 어렵다는 이유로, 순직 인정은 요원한 실정이다.

이제 이 씨는 고개 숙이지 않고 꿋꿋하게 하루하루를 살아내려고 한다. 그게 지금까지 도움을 준 사회와 은인들에게 보답하는 길이라고 믿는다. 지난해 부산소방본부와 인연을 맺은 주류업체 ‘하이트진로’가 운영 중인 ‘소방공무원 가족 처우개선 프로그램’을 통해 아이들도 상처를 보듬을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 아빠를 따라 소방관이 되고 싶다던 첫째에게는 장학금에 이어 마음 편히 시험을 준비할 수 있는 여건도 제공됐다. 이 씨는 “각박해진 세상이라고 하지만 도와주시는 이들이 없었다면 엄두도 내지 못했던 일”이었다며 “남편이 아이들에게 자랑스러운 아빠가 될 수 있도록 도움 주신 많은 분들에게 감사드린다”고 전했다.

글·사진=서유리 기자 yool@busan.com


당신을 위한 AI 추천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