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로365] 균형발전 지금 못 하면 큰 파국 못 면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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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래 신라대 무역경제학부 교수

개항기 한국을 여행하였던 서양인들이 남긴 여행기를 관통하는 키워드는 ‘구별 짓기’였다. 문명화된 자신들과는 다른 미개한 한국을 들추어내면서 스스로 한국인들과는 ‘다름’에서 오는 행복함을 찾는 것이 일반적인 패턴이었다. 소수의 여행기만이 그러한 패턴에서 벗어날 수 있었는데, 대체로 한국에 거주한 기간이 오래된 사람들에게서 그런 경향이 강했다.

구한말 한국에 선교사로 왔던 미국인 제이콥 로버트 무스가 그러한 예외적인 서양인 중의 한 명이었다. 10여 년 넘게 한국에서 생활하면서 보고 느꼈던 것을 책으로 남겼는데, 다른 여행기들과 달리 이 책은 정치와 서울의 일이 아닌 지역 사람들의 삶에 관해 섬세한 기록을 남겼다. 요즘 말로 하면 서울의 시각이 아니라 지방의 눈으로 한국을 바라본 책이다.

구한말 외국인 선교사가 본 서울
끔찍할 정도로 압도적 우위 차지
100년이 더 지났지만 문제 여전

수도권 집중이 저출산 문제 핵심
기득권 포기 않으면 국가도 위태
정부, 더 늦기 전 균형발전 결단을


지역 곳곳의 마을을 다니면서 느낀 무스의 감성에서 수도였던 서울이 가지고 있는 압도적 우위는 기분 나쁠 정도로 끔찍한 것이었다. 사실 오늘날의 입장에서 보면 당시의 서울로 인구집중은 그리 강하지 않았다. 지금은 우리나라 인구 5명 가운데 1명이 서울에 살고 있지만, 19세기까지 서울의 인구는 한국 전체 인구의 3%에 불과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스의 눈에 비친 서울은 한국의 수도를 넘어, 어쩌면 영어식 발음도 비슷한, 한국의 영혼(soul)이었다. 참여정부 시절 추진한 행정수도 이전에 관해 헌법재판소가 관습헌법 논리를 내세워 위헌결정을 내린 것도 바로 서울이 한국의 영혼과 같다는 인식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생각해 보자. 그 영혼은 누구를 위한 영혼인가? 서울만을 위한 영혼인가 아니면 한국 전체를 위한 영혼이어야 하는가? 다시 말할 필요도 없이 한국의 영혼은 한국 전체를 위한 것이어야 한다. 그런데 당연한 것 같은 얘기가 100년도 더 지난 지금에도 여전히 타당하게 다가오는 것은 왜일까? 서울은 나날이 융성해 가고 있는데, 지역은 몰락해가는 이상한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인 서울’이라는 말이 괜히 생겨났을까?

정말 슬프게도 지방의 젊은이들은 서울로 들어갈 기회만 엿보고 있고, 서울이나 수도권으로 들어간 젊은이들은 다시 높은 집값과 생활비로 좌절을 겪으면서 절망을 하고 있다. 그 결과는 세계에서도 가장 낮은 출산이다. 서울로 몰려드는 경쟁만큼 서울의 생산성은 높아지고 활력이 있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그에 비례하여 한국의 저변은 무너지고 있다.

물론 이런 사실을 정부도 모르고 있는 것은 아니다. 원인도 알고 있고 해결책도 알고 있지만 그러한 해결책을 실행에 옮기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과거에도 그랬다. 조선 시대를 통하여 한 수 아래로 여겼던 일본이 19세기에 들어와 우리보다 앞서가는 것을 조선도 알고 있었다. 더욱이 힘을 키운 일본의 배들이 부산 앞바다까지 와서 행패를 부리는 것이 잦아지는 것도 보고 있었다.

그러나 대책은 없었다. 정치라는 이름 속에서 기득권을 지키는 것이 더 중요하였고, 그러다 보니 아무것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시간만 보내다가 결국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다. 이러한 반성은 지금에도 타당하다. 수도권 집중이 저출산의 가장 핵심적인 문제임에도 불구하고 모두 애써 모른 척하며 외면하고 있다. 그러나 그 외면의 대가는 상상을 초월할 것이다. 과거와는 다른 형태로 이 또한 나라의 존망을 결정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지난 몇 달 동안 세론을 달군 주제는 단연 수도권 집값이었다. 연초 대통령의 기자회견 때만 해도 집값은 곧 안정될 것이라는 낙관이 지배했다. 그러나 풍부한 유동성을 앞세운 집값 폭등은 억제 대책까지 무력화시키고 정권의 안정마저 흔드는 파괴력을 보이고 있다. 지금 아니면 집을 사지 못할 것이라는 섬뜩한 눈빛에서 사람들의 내면에 잠재해 있는 광기를 보기도 한다.

결국 수도권 주택공급 확대 방안이 추가로 나오면서 분노가 조금 수그러들고 있다. 그와 함께 오랫동안 수면 밑에 잠자고 있던 행정수도와 공공기관 2차 이전이 수면으로 올라오고 있다. 아쉽게도 균형발전이 아니라 집값 안정을 위해서 나온 고육책이지만, 이마저 실천까지 가는 것은 쉬워 보이지 않는다.

무스가 영혼이라 표현하고 헌법재판소가 관습헌법이라는 처음 들어보는 논리를 동원해서 막으려 했던 데서 알 수 있듯이, 수도권의 기득권은 엄청난 반발을 보일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 결단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균형발전은 서울이 베푸는 시혜가 아니다. 균형발전은 한국이 미래에도 강한 나라로 존속하고 번영할 것인가 아닌가를 결정하는 결정적인 분수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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