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 칼럼] 즐거웠던 AI와의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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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희 편집국 디지털에디터

한때 바둑에 빠진 적이 있다. 순전히 타인의 영향이다. 고교 시절 선배를 따라 사인펜 대롱을 푸르고 붉은 스탬프에 찍어 기보를 만들고, 그 기보로 복기도 했다.

국수전, 명인전 등 쟁쟁한 승부의 결승 대국을 따라 두면서 오묘함을 배웠다. 열정에 비해 실력은 신통찮았다. 급수가 잘 올라가지 않으니 재미가 없어 바둑도 시들해졌다.

노트북을 늘 끼고 살면서 온라인 바둑에 심취하기도 했다. ‘오로바둑’ 등이 인기를 끌었다. 석간신문 발행 시절 신문사 편집국에도 오전 마감이 끝난 뒤 바둑을 두는 선배들이 많았다. 휴게실에 많게는 바둑판이 서너 개까지 놓여 있었고, 라이벌전이 벌어지는 대국은 구경꾼도 많았다.

어설픈 인공지능 놀리며 무시한 적도
이제는 일상 깊숙이 자리 잡은 존재
편의성 극대화 좋지만 이면도 경계를

바둑동호회도 있었다. 이 신선놀음 바둑은 사내에서 점점 시들해졌다. 도낏자루 썩는 오락이니, 점점 빨라지는 뉴스 제작 환경의 적이었다. 한가하게 바둑이나 둘 상황이 아니었다.

그래도 아쉬움이 남은 이들은 노트북 작은 모니터를 들여다보며, 이름 모를 상대와 온라인 바둑을 두었다. 개인적으로 온라인 바둑조차 시들해진 것은 상대의 꼼수 때문이다.

급수를 정해 들어갔는데 상대의 등 뒤에 갑자기 고수가 훈수를 두는지 연이어 신들린 묘수를 발휘하면 화가 치밀었다. 급수 높은 선배의 훈수를 받다가 사실상 선수 교체가 이루어진 바둑에서 끝내 이겨 승수를 올릴 차례가 되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승복도 하지 않고 판을 나가버리는 것이 아닌가. 상대가 너무 괘씸해 운영자에게 신고도 해 보다가 부질없어 온라인 바둑도 그만두었다.

그 뒤 오락프로그램 CD를 파는 곳에서 바둑 게임 하나를 샀다. 궁서체로 제목이 디자인된 북한에서 만든 바둑 프로그램이었다. 4급 수준의 인공지능(AI)이라고 했다. 그 프로그램이 정말 북한산인지는 검증하지 않았다. 다만, 4급이라는 높은 수준에 끌렸다.

그날부터 이 기계와의 대국은 이어졌다. 낮은 급수부터 설정해 대국을 둘 수 있는데 어느덧 도장 깨기 식으로 진행한 대국이 7~8급 정도 상대(컴퓨터)와 둘 시기가 되었다.

그런데 돌발상황이 발생했다. 대마를 몰아붙여 단수를 쳤다. 누가 봐도 다음 수는 뻔한데 아 이 ‘평양 고수’가 갑자기 손을 빼는 것이 아닌가? 찝찝한 승리였다. 그 뒤 의문이 생겨 엉뚱한 수를 두어 보았다. 그랬더니 그 엉뚱한 수를 따라 두는 이상행동을 했다. 급수를 건너뛰고 최고위 급수인 4급 평양 고수에 도전장을 던졌다. 그리고 엉뚱한 수로 판을 흔들어 이겨버렸다. 그 뒤 CD는 어디에 뒀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

한국 바둑의 전설 이세돌이 은퇴한 이유가 알파고와의 대국 때문이라고 한다. 이세돌은 경향신문과 한 인터뷰에서 알파고와 대국에서 패하자 은퇴를 결심했다고 한다. 요즘 바둑 프로기사들은 AI를 스승으로 삼고 바둑을 두며 배운다고 하니 평양 고수에 비하면 격세지감이다.

굳이 알파고나 공상과학영화가 아니더라도 AI는 우리 곁에 성큼 다가왔다. 유튜브에서 특정 가수를 검색해 노래 한 곡을 들었는데 유튜브에 접속할 때마다 그 가수를 보여준다. 한 전자상거래 사이트에서 물건 하나를 골라 보관함에 저장해 두었는데 연합뉴스 앱에서 그 사이트가 느닷없이 등장해 빨리 구매하라고 난리다. 네이버에서 특정 상품을 검색했는데 친절하게 AI추천이라고 안내해 주었다.

이제 AI는 일상생활에 깊숙하게 자리 잡았다. 은행 사이트의 펀드 상품 추천과 설계를 AI가 수행하는 로봇어드바이저가 맹활약 중이다. 119를 소리쳐 부르면 AI가 전화를 걸어 신고를 대신해 주는 기기도 있다.

뉴스를 골라주는 AI도 있다. 이미 구글이나 네이버 등은 그 사람이 선호하는 기사를 더 많이 노출하는 서비스를 하고 있다. 네이버에서 뉴스와 콘텐츠 추천시스템을 에어스(AiRS)라고 한다. 이 에어스가 사용자의 뉴스 사용 데이터를 분석하여 관심 분야 뉴스를 추천하는 방식을 쓰고 있다.

각종 매체는 물론 블로거, 유튜버가 쏟아내는 뉴스와 콘텐츠가 홍수처럼 범람하는 속에서 독자(사용자)는 자기가 원하는 뉴스를 골라본다고 자신만만해하지만, 정작 정교한 AI가 은근히 권하는 뉴스를 편식하는 시대가 되었다.

영화 아이언맨에서 토니 스타크의 똑똑한 AI비서 자비스나, 넷플릭스 영화 마이 마더에서 인간 배아를 부화해 아이를 길러내는 로봇(AI) 엄마는 결코 먼 미래가 아닐 것이다.

급수를 애매하게 속인 ‘평양 고수’는 과거에 ‘팽’당했지만, 에어스는 각 언론사의 뉴스를 사실상 지배하고 있다. 이제 즐거웠던 AI와의 추억은 끝이 났다. 코로나19로 마스크를 쓴 신인류가 탄생했다. 한껏 달라진 세상, AI와의 진짜 대국은 시작됐다. 뻔한 결과인데 갈 길은 희미하다. jaehee@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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