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신춘문예-평론] 0과 1이 된 링컨과 릴리안 기쉬/이병현

부산닷컴 기사퍼가기

삽화=노인호 기자 nogari@busan.com

전통의 순환, 혹은 순환의 전승

<혹성탈출>은 반복의 영화다. 2편의 처음은 1편의 처음을 반복하는 동시에 1968년 작 <혹성탈출>의 기억을 불러왔다. 시리즈 3편에 이르러 시리즈는 영화사 전반으로 반복의 대상을 확장한다.

시리즈의 마지막 편인 <종의 전쟁>은 <지옥의 묵시록>을 닮은 영화다. 평자들은 공통적으로 이 점에 주목한 것 같다. 듀나는 영화가 <지옥의 묵시록>의 캐릭터 구성을 몇몇 따오기는 했어도 "스토리보다는 묵시록이라는 개념 자체에 더 신경을 쓰고 있"다고 보는데, 문강형준 평론가는 여기서 더 나아가 평소 자신이 가진 `파국' 개념에 대한 관심과 결부시켜 <종의 전쟁>을 `파국서사' 계통에 편입시킨다. 이것이 `파국의 서사'에 속하는 작품인지는 몰라도, `묵시록'이라는 테마에 집중한 작품이라는 평은 대체로 수긍할만하다. 이런 선택이 뜻밖으로 여겨지는 까닭은 아마도 이 영화가 묵시록을 그리면서 창세기도 같이 그리기 때문일 것이다.

얼핏 보기에 동떨어져 보이는 두 테마가 <종의 전쟁>에 공존하고 있다. 시작이 끝을 품고 끝이 시작을 품은 이 서사적 곡예는 영화 전반에 걸쳐 놀라운 균형을 유지한다. 곡예를 끝까지 잇기 위해 영화는 고전의 힘을 빌린다. 기이하게도 <종의 전쟁>은 시저가 무리와 떨어져 사적 복수를 결심한 순간부터 "내가 지금까지 대체 뭘 한 거지?"라는 탄식을 내뱉기까지, 영화의 중반부를 서부극의 형식을 빌려 채운다. 이를 위해 전편에서 공들여 개발한 캐릭터 몇몇을 비극적으로 퇴장시키는 것마저 감수할 정도다. 결과적으로 시저는 시리즈와 함께 다시 모든 것을 처음부터 쌓아올려야 한다.

묵시록과 창세기를 한데 담기 위한 그릇으로 서부극을 택한 까닭은 비교적 명확해 보인다. 2편의 핵심 테마는 코바로 대표되는 폭력과 모리스로 대표되는 법의 충돌이다. 이를 해소하기 위해 시저는 스스로 폭력을 집행함으로써 둘의 공존 불가능을 선언하고 법에게 왕관을 씌운다. 결국 `유인원은 유인원을 죽이지 않는다'는 명령은 `유인원을 죽인 유인원은 유인원이 아니다'라는 논리 위에 성립된다. 코바가 유인원이 아니라고 선언하며 이룩한 시저의 왕국은 태생이 동족상잔의 피로 얼룩져있다. 시저의 무모한 복수극은 실제론 시저가 손에 묻은 피를 닦아낼 수 없음을 재확인하는 과정이다. 어찌 보면 그것이 서부극의 기능이기도 했다. 미국의 건국신화로 불리는 서부극은 총이 법전으로 대체되는 과정을 그리면서 종종 폭력이야말로 법의 생성자라는 칼 슈미트의 이론을 지지하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이 점에서 시리즈의 2편과 3편은 다소 길게 나눠 찍은 <리버티 밸런스를 쏜 사나이> 같기도 하다. 혹은 이것은 <수색자>로 시작하여 출애굽기로 끝나는 이야기다. 사적 복수로 시작된 이야기가 덩치를 불려 민족의 탄생으로 끝나는 결말을 우리는 영화사 초기에 지켜본 바 있다. <종의 전쟁>은 <국가의 탄생>의 대담한 거울쌍이다.

디지털 링컨

마지막에 이른 시저의 얼굴엔 많은 평자들이 언급했다시피 모세와 스파르타쿠스를 비롯한 많은 전거들이 어른거린다. 비탄에 잠긴 채 죽음을 맞이하는 침팬지의 이미지는 그 자체로 회화적이다. 심지어 카메라는 이를 두려워하는 대신 클로즈업으로 강조한다. 언덕배기에 걸터앉아 눈을 감는 시저의 얼굴 뒤편에 후광처럼 비추는 햇살은 상당히 과장되어 있어 순교자를 그린 바로크풍 그림의 배경에서 떼어온 것만 같다. 이 장면에 담긴 정적인 멜랑꼴리는 시저를 삶과 역사의 장에서 들어올려 죽음과 비탄의 왕국으로 옮긴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내가 위에서 말한 비탄과 죽음의 이미지에 대한 묘사는 톰 거닝이 말한 링컨 이미지의 전형이기도 하다. 놀랍게도 아직 <종의 전쟁>과 관련해서 링컨의 얼굴을 언급한 평자는 없는 것 같다.

톰 거닝은 자신의 에세이 [포드와 그리피스의 링컨 Mr. Lincoln by Mr. Ford and Mr. Griffith]에서 "링컨 이미지"가 무성영화 시기에서 유성영화의 고전시기로의 전이를 가리키는 대상이라고 주장했다. 그에 따르면 링컨은 캐릭터가 아닌 이미지로서 영화사에 들어왔다. 그렇다면 침팬지 캐릭터에게서 링컨 이미지를 발견할 수 있다는 것도 극단적 가정은 아닐 것이다. 톰 거닝이 언급한 링컨 이미지의 몇 가지 특징은 <종의 전쟁>의 시저와 겹친다. 환상적 시각으로 묘사된 수척하고 쓸쓸한 골상학, 키가 크고 껑충한, 때로는 기이한 형체. 특히 1편과 2편의 청년 시저는 존 포드의 <젊은 날의 링컨>, 헨리 폰다와 유사한 껑충껑충한 발걸음, 논리를 벗어난 말투, 수염 없는 얼굴과 언덕을 올라 죽음을 향함으로써 상징 차원으로 승화되는 마지막 장면의 정서를 공유한다. 그런데 링컨의 얼굴은 존 포드만의 얼굴은 아니다. 링컨 이미지는 본래 그리피스의 것이었다. 3편부터 시저의 얼굴에 추가된 수염은 이 영화의 시저가 늙은 시저이자 그리피스의 링컨에 가깝다는 것을 가리키는 알레고리로 보인다. 톰 거닝에 따르면 그리피스의 링컨은 존 포드의 링컨보다 정서적으로 과장되어 있으며, 일정 부분 역사와 운명에서 길어 올린 드라마에 기대어 장면의 탁월함을 성취하는 존 포드와 달리 첫 장면부터 오직 상징 형식의 힘만을 이용해 버틴다. 이처럼 두 감독이 링컨 이미지를 사용한 방식은 약간의 차이를 보이지만 목표는 공히 하나였다. 이 둘은 유성영화의 태동기에 무성영화의 태도를 고집하고자 했으며, 무성영화의 유산을 링컨 이미지로 형상화함으로써 유성영화에 도입했다. 결과적으로 포드의 성공으로 인해 링컨 이미지는 헐리우드 고전기에 큰 흔적을 남기고, 무성영화는 변형된 형태로나마 살아남게 된다.

상징 양식으로서의 링컨이 고전기를 지나 현대에 이르기까지 살아남았다는 주장은 선뜻 믿기지 않는 일일 수도 있다. 그러나 공룡이 새가 된 것처럼 링컨 또한 침팬지가 됐을 뿐이다. <종의 전쟁>이 실로 오랜만에 보는 고전적 영화라는 여러 평자들의 공통된 지적은 이런 의미에서 의미심장하다. 게다가 링컨이 침팬지의 몸을 빌려 나타난 것도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이미 우리는 2001년 팀 버튼 버전 <혹성탈출>의 결말에서 이를 목격한 바 있다.

시저가 침팬지의 몸을 빌린 링컨 이미지라고 가정할 때, 이 선택은 질문을 불러일으킨다. 왜 컴퓨터 그래픽 기술의 최첨단을 달리는 대형 프랜차이즈는 자신의 안에 무성영화의 유산을 기입했을까? 이러한 명백한 시대착오는 그 자체로 그리피스가 유성영화에서 했던 시도를 반복하는 것이다. 그리피스는 자신의 첫 유성영화인 <에이브러햄 링컨>을 공개한 직후, <국가의 탄생>에 사운드를 입혀 재개봉한다. 톰 거닝은 두 영화 사이에 강한 연결고리가 있다고 가정한다. 더 나아가 <에이브러햄 링컨>은 그리피스가 이전에 만든 무성영화에서 따온 부분들이 많이 보인다고 썼다. 그런데 그는 여기서 헨리 B. 월트홀의 얼굴에 새겨진 주름을 언급한 뒤 더 이상의 논의를 진전시키지 않는다. 이 모든 사실은 그저 그리피스의 링컨 이미지에 대한 배경으로 제시되는 정도에 그친다. 그가 이상할 정도로 언급하지 않는 것은 링컨 이미지 이전에 그리피스에겐 그보다 더 중요한 하나의 이미지, 릴리안 기쉬가 있었다는 점이다. 그리피스의 페르소나는 릴리안 기쉬였지 링컨이 아니었다. 어쩌다 그 많던 무성영화의 유산을 링컨 이미지가 다 먹어 치우게 된 것일까?

꽃잎을 상상하기

하나의 질문에서 시작하자. 노바가 "이제 나도 유인원이야?"라고 물었을 때, 왜 모리스는 선뜻 "그래"라고 대답하지 않았을까? 그 대신 모리스는 "노바는 노바야"라고 말한다. 이 대답은 감동적이지만 동시에 논점일탈이기도 하다. 물론 이것은 무의식적 회피가 아닌 유도된 회피다. 애초에 질문이 잘못됐기 때문이다. 호모 사피엔스는 생물 분류에 따르면 영장목 사람과로서, 원래부터 유인원이다. 그러니 노바의 질문에 긍정해 "그래, 인간은 유인원이야"라고 대답하게 되면 그건 곧 "인간은 인간이야", 혹은 "사과는 사과야"라고 말하는 것과 진배없다. 한편 "노바는 노바야"라는 동어반복이 회피가 주는 꺼림칙함이 아닌 선문답이 줄 법한 감동을 전달하는 것은 모리스가 질문에 담긴 저의를 파악하고 함정을 피해 적절한 대답을 하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아마 모리스는 노바의 질문이 뜻하는 바를 깨달았을 것이다. 노바의 질문은 생물학적 분류를 향한 것이 아니라 사회학적 위계를 향한 것이었다. "이제 나도 유인원이야?"라는 질문은 "이제 나도 시저가 이끄는 공동체의 일원이야?"를 뜻하는 말임과 동시에, "이제 인간도 침팬지, 오랑우탄, 고릴라, 긴팔원숭이와 똑같은 '유인원`이야?"를 뜻하는 말이기도 하다. 모리스, 공동체의 현자는 전자에는 대답하되 후자에는 대답하지 않는다. "노바는 노바야"는 결국 "인간이든 유인원이든 너는 나에게 언제나 노바야"라는 말이다. 그렇다, 감동적이다. 그러나 과연 질문은 온전히 답변되었는가? 사회적 위계를 사적 관계로 치환해 우회적으로 답함으로써 모리스는 질문 자체를 변형시킨다. 이것은 회피는 아니지만 훌륭한 유예다. 답변은 반으로 나뉘어 나머지 반은 단지 미래로 유보되었을 따름이다. 오리지널 <혹성탈출> 시리즈는 아마도 그 유보된 대답 중 가능한 하나였을 것이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이런 머뭇거림은 너무나 이상한 것이다.

애초에 시저가 이끄는 유인원 공동체는 어떻게 가능한 것일까? 침팬지와 고릴라는 인간이 오랑우탄과 닮은 만큼만 닮았다. 사슴이 보기엔 인간이나 침팬지나 그게 그거일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아무튼 이들은 `유인원'이라는 이름 아래 하나의 균일한 집단을 이룬다. 피부색이나 털 색깔이 다르다는 이유로 서로 죽이고 차별하는 종이 있다는 걸 상기해보면 이 공동체가 성취한 평등주의가 얼마나 놀라운 수준인지 알 수 있다. 영어에 기반한 수화를 에스페란토어 삼아 이뤄진 이 초종족적 공동체가 겪는 수난은 자연스레 기독경 속 유대민족을 떠올리게 만든다. 명백히 출애굽기를 의식한 시저의 최후는 그 연상을 정당화시켜주는 듯하다. 영화의 부제를 <종의 전쟁>이 아닌 <(민)족의 전쟁>으로 바꾸는 편이 바람직할까? 인간과 인간을 제외한 다른 유인원 연합의 전쟁, 사람을 제외한 다른 유인원 종을 포괄하는 유인원 민족의 탄생. 베네딕트 앤더슨의 유명한 분석에 따르면, 민족의 형성 과정에는 타자의 존재가 필연적으로 따라온다. 그렇다면 모리스가 머뭇거린 이유를 여기서 찾는 건 간단한 일이다. 종족을 초월해 하나가 된 유인원 민족주의가 노바를 품지 못하고 그 앞에서 멈출 수밖에 없는 건 침팬지와 고릴라를 하나의 민족으로 묶기 위해 설정된 타자가 인간이기 때문이다. 모든 유인원은 하나다, 인간은 빼고. 아니, 인간을 뺐기 때문에 비로소, 모든 유인원은 하나가 될 수 있었다. 노바를 공동체의 일원으로 인정하는 순간 공동체는 무너진다. 코바가 아닌 시저라도, 심지어 모리스라 해도 그 위험은 감수할 수 없다. 때문에 노바를 공동체에 들이면서도 인간은 공동체에 들이지 않기 위해 모리스는 노바는 단지 노바일 뿐이라고 강조한 것이다.

이상은 논리적인 논법이지만 여전히 내게 모리스의 머뭇거림은 부자연스럽게 느껴진다. 이 위화감의 원인을 찾아가다 보면 모리스라는 캐릭터에 닿는다. 씨네21의 김혜리 기자는 <혹성탈출: 종의 전쟁>에 찬사를 보내며 이 부분을 명확히 지적한다.

서커스 출신 모리스는 어린 인간에게 부드러운 면을 보이고 예술적 재능이 있으며 상황을 넓게 본다. 상황에 흔들림 없는 당위를 확인시키는 무리의 미네르바다. 모리스가 시저의 가장 존경하는 동지이자 경청하는 반대자인 이유는 그의 카리스마가 시저의 권위와 겹치지 않는 속성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이상의 특질들은 나로 하여금 <혹성탈출: 진화의 시작>이 끝날 때까지 모리스를 여성으로 추정하게 만들었다. 그러저러한 속성이 여성만의 것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이렇게까지 캐릭터를 만들어놓고 이미 여성이 심하게 배제된 이야기에서 굳이 모리스까지 남성이라고 정했는지가 미스터리다. 게다가 모리스를 연기한 배우는 여성인 카린 코노발이다.

이 미스터리야말로 <혹성탈출: 종의 전쟁>이 진정 드러내기 꺼려한 의문이다.

여성배우의 연기에 바탕을 두었으나 그것이 남성으로 받아들여진 유명한 경우를 모리스의 경우와 비교해볼 만하다. <엑소시스트>에서 소녀의 몸에 들어간 악마는 흔히 남성 악마로 받아들여졌다. 『여성괴물』에서 바바라 크리드는 악마의 목소리를 연기한 배우가 여성이라는 점을 명확히 지적하며 왜 이 악마가 여성 악마인지를 증명한다. 그러나 이 경우 널리 퍼진 오해는 변형된 목소리가 흔히 남성적 특질로 여겨지는 행위와 결합해 편견을 부추긴 결과였다. 모리스의 경우엔 반대로 목소리가 행위와 불일치하며 편견을 배신한다. 대중영화가 구태여 대중의 편견을 배신할 땐 목적이 있는 법이다. 이 선택으로 부정되는 것은 여성성 그 자체다. 폭력과 법, 그리고 그 둘 사이에서 갈등하는 주권자는 모두 남성으로 설정된다. 그럼으로써 영화는 모리스를 `아버지의 이야기를 아들에게 전해주는' 신화의 일부로 편입시킨다.

이는 상상의 공동체와 그 담지체로서의 여성이라는 신화가 무시무시한 관성을 발휘한 결과다. 여성은 공동체 내부의 타자로 기능한다. 여성은 타자성이 은폐된 타자이자 착한 타자이며, 가장 오래된 타자다. 영화사에서 이 이미지는 릴리안 기쉬를 원천으로 두고 있다.

일종의 순결한 미국을 상징하는 릴리안 기쉬 이미지는 그리피스의 작품 세계에서도 수많은 변용을 거쳤고, 존 포드는 그리피스의 링컨 이미지를 물려받은 만큼 릴리안 기쉬 이미지 역시 물려받았다. 이 이미지는 링컨 이미지처럼 가시적이지는 않으나, 그보다 광범위한 영역에 걸쳐 은밀히 드러난다. 그리피스의 1919년 작 <흩어진 꽃잎>의 한 장면을 떠올려보자. <흩어진 꽃잎>은 여기저기서 끌어온 그리피스의 이미지와 테마들이 한데 뒤섞이며 부서져 내리는 영화다. 이 영화에서 릴리안 기쉬는 폭군 아버지가 행사하는 가정폭력에 수시로 고통받는 캐릭터 루시로 등장한다. 루시는 평생 불행했기에 웃는 방법을 몰라 미소 짓기 위해선 입꼬리를 손가락으로 올려야만 한다. 불행은 영화 중반 아주 짧은 휴지기를 갖는데, 루시가 우연히 그녀를 짝사랑하는 중국인의 가게 앞에 쓰러져 그의 집에 머물렀기 때문이다. 중국인은 루시를 광적으로 사랑하나 그 사랑은 어디까지나 "순수한 것"으로 남았는데, 루시가 중국인의 집에서 잠을 잤단 사실을 알게 된 루시의 아버지는 폭발하고 만다. 아버지가 장롱 안으로 도망친 루시를 잡기 위해 도끼로 문을 부수는 장면은 루시의 비명지르는 얼굴과 교차되며 공포와 광기를 강조한다. 결국 루시는 채찍에 맞아 숨을 거둔다. 이 장면은 히치콕의 <사이코>와 큐브릭의 <샤이닝>에 영향을 준 것으로 흔히 언급된다. 심지어 <샤이닝>에선 도끼라는 소품이 고스란히 재등장하기도 한다.(톰 거닝에 따르면, 도끼는 링컨 이미지의 대표적 상징 중 하나이다) 존 포드의 <역마차>에서 발견되는 영향은 이 두 영화보다는 좀 더 은밀한 것이다. 허문영 평론가는 <역마차>에 대한 KMDB 연재 글에서 그리피스를 의식하지 않으면서도 이 장면을 명료하게 묘사한 바 있다.

아파치에게 총을 쏘는 핫필드의 표정은 살인의 기쁨으로 가득하다(#1). 그러다 총알이 한발 밖에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2), 자신이 정성을 다해 보호하던 맬로리 부인에게 총을 겨눈다(#3). 아파치에게 `더럽혀지기 전에' 자기 손으로 죽이려는 것이다. <수색자>의 이산 에드워즈를 연상케 하는 남부연합군 출신의 이 사내는 살인광의 피를 가진 광적인 인종주의자다.

세 컷의 짧은 시퀀스는 핫필드의 우연한 죽음으로 끝난다. 아파치가 쏜 총알에 맞지 않았다면 핫필드는 맬로리 부인을 살해했을 것이다. 이 장면에서 <흩어진 꽃잎>을 연상하는 것은, 그리피스와 포드의 관계를 떠올려보면 자연스러운 작용이다. 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해 타자를 설정하는 것처럼, 국가를 지키기 위해선 그 순결함이 보존되어야만 한다. 그러나 물론, 이 연상작용은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대신 한차례 숙고를 거치길 요구한다. 이처럼 살인강박으로 이어지는 순결에 대한 강박은 릴리안 기쉬 이미지의 핵심을 형성한다. 그러나 이 강박증은 유성영화 시기 전반에 걸쳐 점차 은폐되기 시작했고, 그 변용은 존 포드 자신의 작품에서 이미 일어났다. 이런 의미에서 톰 거닝의 링컨 이미지에 대한 통찰은 역설적이다. 이 통찰의 뛰어남은 릴리안 기쉬 이미지에 대한 기나긴 영화사적 침묵을 강조한다.

다시 한 번 링컨 이미지가 상징하는 바를 떠올려보자. 링컨은 총 대신 법전을 든 변호사이자, 정치인이다. 링컨은 서부의 법, 즉 총으로 상징되는 폭력의 시대가 끝난 뒤, 이를 대신하는 법을 통해선 해소하지 못할 갈등(이를테면 남북 전쟁)이 일으킨 법의 공백지대를 정치라는 수단으로 메꾸는 인물이다. 그런데 이때 그리피스와 포드의 링컨이 법과 정치의 영역으로 완전히 넘어가기 위해선 반드시 첫 사랑 앤 러틀리지의 죽음이 강요된다. <에이브러햄 링컨> 개봉판에서 그 죽음에 대한 링컨의 감정적인 반응이 잘려 나갔다는 것은 이 죽음이 얼마나 핵심적이고 불온한 것인지를 드러낸다. 존 포드는 그 죽음의 불온함을 견디지 못한 나머지 허문영 평론가가 "존 포드 영화 전체를 통틀어 가장 잔혹하고 아름다운 몽타주"라고 표현한 흐르는 강물로부터 얼어붙은 강물로의 컷을 감행한다. 죽음에 대한 과감한 생략은 역설적으로 그 죽음을 영화 내내 의식하게 만든다. <젊은 시절의 링컨>에서 링컨이 강을 바라보는 몇몇 장면에서 그는 분명 죽음을 바라보고 있다. 말하자면 명백한 부재가 그곳에 존재한다. 현존하는 부재. 무성영화의 유산인 링컨 이미지는 사라진 첫사랑, 무성영화의 아이콘 릴리안 기쉬를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얼어붙은 강의 표면은 링컨이란 이름을 가지고 있으나 실상 그것은 릴리안 기쉬 이미지의 지류에 지나지 않는다.

혹성의 추억

살인 강박과 직결되는 순결에 대한 강박은 <종의 전쟁>의 서사를 추동하는 힘이다. 여기서 순결함, 즉 순수한 인간성은 `언어 지능'의 유무로 증명된다. 대령이 시저 앞에서 존속 살해를 고백하는 장면에선 <흩어진 꽃잎>의 장롱 장면에 담긴 광기가 배어나온다. 그러나 이 광기는 인간만의 전유물은 아니다. 앞서 말했다시피 시저는 링컨 이미지를 체화한 캐릭터인데, 링컨 이미지의 특징 중 하나인 죽음에 대한 강박이 3편에서 두드러진다. 그런데 이 죽음충동엔 링컨 이미지의 전형과는 충돌하는 지점이 있다. 링컨의 응시가 다가올 역사적 운명에 대한 담담한 수긍이라면, 시저의 응시는 뚜렷한 목표의식을 지닌 파괴충동이다. 시저는 복수극에 나선 뒤부터 코바의 환상에 시달린다. 이 환상은 점점 더 강렬해지는데, 마지막에 가서 시저는 결국 자신의 안에 코바가 있음을 고백한다. 이미 법이 지배하는 시대에 태어나 변호사로 출발한 링컨과 달리, 시저는 <리버티 밸런스를 쏜 사나이>의 랜섬과 톰을 한 몸에 품은 존재다. 시저는 법전을 든 변호사이면서 동시에 총을 든 서부 사나이다. 이 두 가지 정체성 사이에서 진동하던 시저는 결국 자살에 가까운 방식으로 죽는다. 링컨과 달리 시저는 이미 2편에서 법의 공백지대를 정치로 메꾸려던 시도에 처참히 실패했다. 정치의 기능 정지는 필연적으로 법의 공백지대에 폭력을 불러온다.

시저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것은 정치의 실패가 생성한 동어반복의 문제다. 코바가 유인원은 유인원을 죽이지 않는다고 하자 시저는 코바는 유인원이 아니라고 답한다. 이는 노바는 노바라고 한 모리스의 말과 한쌍을 이루며 성립한다. 노바는 노바고 코바는 유인원이 아니다. 하나의 민족정체성이자 국적이 된 유인원 공동체는 코바를 타자화시키고 노바의 이름을 호명함으로써 인종의 용광로가 되기보단 샐러드가 되기로 결정한다. 시저의 순교로 그 이상적 공동체는 국가로 완성된다. 이 판타지는 미국식 공동체주의가 가닿을 수 있는 어떤 이상이며, "미국보다 더욱 미국적인 영화"를 만들어온 헐리우드 클래식의 적통을 잇는다. 그러나 경탄을 표할 수밖에 없는 이 고전주의적 전통은 고전 그 자체에 내재한 한계를 여실히 드러낸다. 시저가 1편에서 보인 기이한 행동을 떠올려보자. 1편의 초반부에 시저가 처음 숲에 간 장면은 나무를 뛰어놀던 아기 침팬지가 소년기에서 청년기로 성장하는 데쿠파쥬로 이어진다. 성장한 시저는 돗자리에 누워있던 인간 연인들을 향해 뛰어내리고, 자신의 아버지가 목줄을 채우는 사이 아버지의 연인을 향해 입술을 내민다. 이 장면은 아버지와 어머니의 키스를 흉내내는 유아적 행위라고 보기엔 상당히 위협적인 구도로 찍혔고, 여성은 미약하지만 분명 겁에 질린 표정을 짓는다. 뒤이어 목줄 찬 개를 위협한 뒤 자기가 애완동물이냐고 묻는 장면에서, 시저는 마치 여성에게 키스할 수 있는 인간 남성을 질투하는 것 같다. 실상 모리스와 노바의 문답 장면은 1편의 이 장면을 고스란히 가져온 것이다. 다만 상황은 반대로 바뀌어, 노바는 시저와 달리 육체적으로 전혀 위협을 주지 못하는 무해한 존재다. 대화도 익숙한 쇼트-리버스 쇼트로 찍혔기 때문에 1편의 질문에 담긴 불안감을 3편에서 느끼긴 힘든 일이다. 관객은 그저 안심한다. 그러나 애완동물이 아닌 아들이라는 대답이 유인원의 반란으로 이어졌다면, 유인원이 아닌 노바라는 대답이 같은 반응을 이끌어내지 못한다는 건 불공평한 일이다. 두 대답이 공유하는 정서는 기본적으로 같다. 뭐라고 답하든 상대방은 내 통제 아래 있다는 확신이다.

시저를 복수극으로 이끈 것 역시 이 확신이다. 시저는 아들에게 가족을 맡긴 채 싸움에 나섰다가, 돌아와 그 모두가 죽은 것을 발견한다. 이 장면은 일견 당연한 분노로 이어지는데, 문제는 그 분노가 정도를 지나쳐 자신이 이끌던 무리를 버릴 지경에 이른다는 것이다. 1편과 2편에서 보여주던 거의 이상적인 리더쉽에 비하면 너무나 감정적인 결정이다. 시저는 분노에 눈이 멀었다. 그리고 이 엄청난 분노는 순수하게 아버지의 영역에 속한다. 부모의 사랑은 굳이 정신분석학을 인용하지 않더라도 자식에 대한 통제욕구와 결부된다. 즉 관객이 감정이입 하게 되는 부성애로 인한 분노는, 다른 말로 표현하면 자신이 완벽하게 통제하고 있다고 생각한 상황이 깨지자 발생하는 분노다. 가족의 안전을 지키지 못한 것은 사랑이 부족했기 때문이 아니라 자신이 상황을 더욱 완벽하게 통제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자 아버지의 법은 자신의 기원을 찾아 거슬러 올라간다.

스스로를 주권자라 믿는 자는 분노에 제동을 걸지 못한다. <역마차>의 핫필드나 <수색자>의 이단처럼 광적인 인종자의자는 아니라 해도 시저는 <흩어진 꽃잎>의 자기파괴적 추적을 반복한다. 시저의 여정을 보며 우리가 암시적으로 깨닫게 되는 것은 애초부터 루시를 향한 아버지의 분노와 광기는 인종주의에서 기인한 것이 아니란 사실이다. 아버지의 추격은 감히 통제를 벗어나 오염되길 시도한 나쁜 타자가 침해한 자신의 권리를 되찾으려는 시도다. 순결한 국가를 상징하는 여성에 대한 통제권 획득이야말로 남성 캐릭터가 가진 초유의 관심사이다. 그들은 이를 되찾기 위해선 오염의 원천인 이방인 남성에게 죽거나, 차라리 여성을 살해하는 것마저 감수할 수 있다. 시저의 경우, 코바의 피로 물든 손은 대령에게 전염된 바이러스처럼 이미 자신과 한몸이 되어버렸다. 그러자 시저는 대령과 마찬가지로 순수를 꿈꾸며 죽는다.

결국 문제의 핵심은 이렇다. 이토록 훌륭한 순교자의 죽음이 어떻게 오리지널 <혹성탈출>의 끔찍한 미래로 이어지는가? 왜 모리스의 미뤄진 대답은 악몽 같은 메아리로 돌아왔는가? 오해를 막기 위해 말하자면, 그 미래는 침팬지가 인간을 지배하기에 끔찍한 것이 아니라 침팬지마저 인간의 과오를 반복하기에 끔찍하다. 분명 시저도 모리스도 침팬지가 인간을 사냥하는 유인원 국가의 도래를 바라진 않았을 것이다. 어쩌면 이 유인원 국가의 탄생과 실패는 모리스가 "노바는 노바야"라고 답하기 전, 시저가 "코바는 유인원이 아니야"라고 선언하기 훨씬 전, "연합은 반드시, 그리고 결단코 보존될 것이다"라고 링컨이 연설한 그 순간에 이미 예정된 것일지도 모른다.

시저의 광기는 약간의 운과 뒤늦은 깨달음이 아니었다면 공동체를 파멸로 이끌었을 것이다. 한편 시저에게 찾아온 약간의 운이라 해야 할 노바는 자신의 캐릭터가 지닌 무해함으로 "유인원은 뭉치면 강하다"는 명제를 전달해 파멸을 막으며, 동시에 캐릭터가 가진 이미지의 힘으로 이 공동체에 균열을 일으킨다. 고릴라 루카가 노바의 귀에 매화를 꽂는 아름다운 장면은 <흩어진 꽃잎>에서 중국인이 루시를 "나의 꽃"이라 부르며 "순수한 사랑"을 상징하는 꽃다발을 바친 장면을 떠오르게 한다. 그 순수한 사랑이 루시의 죽음으로 연결됐듯이, 소녀와 고릴라 사이에 꽃핀 아름다운 우정은 이미 이 순간부터 오마쥬의 대상인 오리지널 <혹성탈출>의 벙어리 노예 노바를 예시한다. 먼 훗날 오리지널 <혹성탈출>의 주인공은 <수색자>의 이단이 데비에게 그러했듯 거부하는 노바를 억지로 말에 태워 끌고간다. <종의 전쟁>의 노바는 <혹성탈출>의 노바가 아니지만, 두 캐릭터의 병치는 가장 잔혹하고 아름다운 이미지를 형성한다. 그러나 철저한 숙고를 요구하는 이 이미지는 뒤늦은 깨달음을 얻은 시저의 회한과 그 죽음이 불러일으킨 멜랑콜리에 비해 사소한 것이다. 모리스는 그 앞에서 눈물을 흘리며 건국신화의 부계 전승을 약속한다. 링컨의 다짐이 첫사랑의 무덤 앞에서 이루어졌음을 기억하라. 오직 수컷인 자들만 신화의 주인공으로 살아남는다. 시저의 죽음은 링컨 이미지라는 상자 안에 마지막으로 남겨진 것, 손가락으로 입꼬리를 밀어 올려 억지 희망을 자아내는 릴리안 기쉬의 이미지의 편재를 폭로한다.


당신을 위한 AI 추천 기사

    실시간 핫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