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른말 광] 내려놓을 수 있는 특권

부산닷컴 기사퍼가기

/이진원 교열부장

"공직에 앉아 도둑질을 하는 부패한 공무원들에겐 손모가지를 잘라버리겠다."

어느 대통령 후보가 이런 공약을 했다. 속 시원해할 사람 많겠지만, 우리나라 얘기는 아니다. 지난 멕시코 대통령 선거에 나선 칼데론 후보가 한 공약인 것. 한데, 저 기사 문장에서 '손모가지'라는 표현은 좀 걸린다. 국립국어원에서 펴낸 <표준국어대사전>(표준사전)을 보자.

*손모가지: ①'손'을 낮잡아 이르는 말. ②'손목'을 낮잡아 이르는 말.

쉽게 말해 손을 손모가지라 하는 건 '뱃사람, 등, 흑인'을 '뱃놈, 등짝/등때기, 깜둥이'로 부르는 것과 같다는 얘기다. '낯, 눈알, 목, 발'을 속되게 부르면 '낯짝, 눈깔, 모가지, 발모가지/발목쟁이'가 되고, '배, 엉덩이'를 속되게 쓰면 '배때기, 엉덩짝'이 될 터.

'…저보고 금수저를 물고 태어났다고 합니다.…그동안 그 금수저를 꽉 물고 있느라 입을 앙다물었습니다. 이빨이 다 금이 간듯합니다.…이제 그 특권도, 책임감도 내려놓습니다.…'

내년에 그룹 회장에서 물러나겠다고 밝힌 이웅렬 코오롱 회장이 지난주에 사내 인트라넷에 올린 서신 구절이다. 한데, 여기 나온 '이빨' 역시 '이, 치아'를 낮잡아 이르는 말. 그러니 "할아버지 이빨이 누레요"처럼 쓰면 안 된다는 얘기다. '금이빨, 생이빨'도 '금니, 생니'라야 하는 것.(다만, 동물 따위에는 써도 된다.)

한데, 표준사전 뜻풀이나 보기글을 보다 보면, 국립국어원도 좀 헷갈려 하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돌니: 자갈이나 돌이 많은 길에 이빨처럼 뾰족하게 나온 돌 조각.

*옭매다: ①끈이나 줄 따위가 풀리지 않도록 고를 내지 않고 그대로 꼭 매다.(엄마는 허리띠를 끄르더니 고방 열쇠를 이빨로 매듭을 지어 꼭꼭 옭매었다.) ②….

하긴, 소설가들마저 종종 쓰는 판이긴 하다. 아래는 표준사전 보기글.

*이빨을 닦던 중이라 칫솔을 입에 문 채 나는 베란다로 나가서 차를 굽어봤다.(<김승옥, 서울의 달빛>)

*성 중위 옆을 지날 때 운전대 옆에 앉은 흑인 병사가 손을 창밖으로 내어 흔들면서 하얀 이빨을 드러내 놓고 웃었다.(<서정인, 후송>)

뭐, 하여튼, 그래도, 낮잡아 이른다는 표준사전 뜻풀이가 바뀌지 않는 한, '손, 이' 대신 '손모가지, 이빨'이라 쓰는 일은 피해야 하는 게 지금 우리 말법이다. jinwoni@busan.com


당신을 위한 AI 추천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