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를 품은 카페] 골목에 녹아, 사람에 스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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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진구 '세로커피'는 입구부터 묘한 분위기의 통로로, 시간여행을 하는 듯하다.

<부산일보>는 격주로 '핫플레이스'를 연재합니다. 이름 그대로 요즘 화제가 되고 부산과 근교의 공간을 찾아가, 그곳의 재미와 숨은 의미를 탐방하고 그곳의 사람 이야기를 싣는 면입니다. 페이스북이나 인스타그램 같은 SNS에서 뜨는 젊은 공간이든, 숨은 사연이 소개돼 화제를 모으고 있는 오래된 장소이든 가리지 않고 찾아가겠습니다.


꼭 미술관을 찾아야 예술품을 감상할 수 있을까. 극장이나 홀에서만 가수와 연주가들의 멜로디를 즐길 수 있는 걸까. 산보하듯 걸어가 누군가의 혼이 담긴 작품을 감상하고, 작은 방에 모여 연주가의 숨소리와 함께 생생한 음악을 듣는 것도 낭만적이지 않을까.

범천동 '세로커피'

예스러워 더 세련된 공간서
마을과 공생 꿈꾸는 주인 부부
동네 '로구로 장인' 작품전 등
젊은 작가들과 협업 전시 마련
이색카페 넘어 문화 중심지로

■시간여행 터널 속으로, 세로커피

부산진구 범천동 신암로를 따라 공장과 낡은 주택을 풍경 삼아 걷다, 바닥에 세워진 '세로커피' 나무 팻말을 만났다. 팻말 안내를 따라 폭이 좁은 골목에 접어드니 일제강점기 때 별장 같은 3층 높이의 붉은 건물이 나타난다.

활짝 열린 스테인리스 문 뒤로 흰색의 2~3평의 현관이 있고 중앙엔 적갈색 나무 문이 버티고 있다. 손잡이를 돌려 문을 여니, 길쭉한 통로가 펼쳐진다. 은은한 불빛이 묘한 분위기를 자아내며 이 통로가 마치 시간여행의 터널 같다. 그 끝엔 1920~1930년대 과거 문인들이 기다리고 있을 것 같다.

"부산 곳곳을 돌아다녔는데, 재개발이 많아서 인지 이 건물처럼 옛 원형을 보존한 곳이 거의 남아 있지 않다"며 "전체적으로 앤틱하면서도 우아한 느낌의 공간으로 꾸몄다"고 김홍일 대표가 말했다. 홀에 퍼지는 스윙재즈 음악과 그가 입고 있는 회색 조끼가 어울리며, 김 대표는 김유정이나 이상 같은 옛 문인과 동시대 사람처럼 보인다.
예스러운 인테리어와 소품이 감성을 자극한다.
30여 평 정도 남짓한 세로커피는 이질적인 느낌으로 개점 반년 만에 젊은 층들 사이에서 화제가 되고 있다. SNS엔 방문 인증샷이 넘치고, 그걸 보고 찾아오는 이도 많다.

오래된 전축과 타자기, 옛 문화잡지 등 소품이 깔끔하게 정렬돼 있고 하얀 벽지와 붉은 세로나무 벽, 고풍스러운 문양의 나무창 등 공간 자체도 이색적이다. 예스러워서 더욱 세련된 분위기가 인기 비결이다. 깊은 맛이 나는 '세로슈페너'나 촉촉한 브라우니 등 맛의 평가도 상당히 긍정적이다.

그러나 세로커피가 특별한 것은 분위기와 맛 때문만은 아니다. 이곳은 마을과 공생을 꿈꾸는 공간이다.

세로커피는 김홍일 대표 외에도 김수현 대표가 함께 운영하고 있다. 두 사람이 함께 커피를 내리는 모습에서 금세 부부 사이라는 걸 눈치챌 수 있다. 김수현 대표는 "도시재생에 대해 관심이 많았다. 서울서 함께 대기업을 다니다 마을 문화를 꽃피우는 공간을 만드는 일을 하고 싶어, 고향으로 내려왔다"라고 말했다.

두 사람의 꿈은 커피숍 운영을 넘어 범천동 일대를 문화공간 중심으로 재생하는 것이다. 올 10월 세로커피에선 로구로(나무를 둥굴게 깎는 기술)장인 김정호 씨의 작품전이 열린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작품전의 테마는 '동네의 장인, 그 분들의 삶과 이야기'였다.
주인 부부는 마을재생의 중심지를 꿈꾼다.
김정호 씨는 범천동에서 수십 년 나무를 깎아온 기술자이다. 세로커피는 그의 공예품에 세월의 흔적과 장인의 혼이 담겨 있다는 것을 주목했다. 기계로 찍어내는 공예품에 점점 밀려가는 로구로 장인의 모습이 공장이 떠나고 휑한 바람이 부는 이 마을의 모습을 상징하기도 했다.

세로커피와 부산 작가들이 협업으로 그의 공예품을 예술품으로 승화시켜 전시했고, 젊은 손님들은 커피숍에서 목공예의 세계를 접하는 신기한 경험을 했다. 세로커피는 비슷한 형식의 또 다른 작품전을 기획하고 있다.

김 씨 부부는 "젊은 작가들과 함께 동네의 오래된 장소나 장인을 발굴해 예술전시하도록 하겠다"며 "세로커피가 이색공간을 넘어 마을문화 중심지가 되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남항동 '문제없어요' 
심플한 가게명에서 따스함이 느껴지는 영도구 '문제없어요'는 아기자기한 인테리어와 소품에서 주인의 취향이 고스란히 전해져 둘러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만화캐릭터 같은 주인장 엉뚱 취향
배트맨 가면 등 재밌는 소품 곳곳
방명록엔 손님들 이야기 빼곡
한두 달마다 작은 콘서트장 변신
관객·뮤지션 음악으로 하나돼

■숨소리도 들리는 콘서트장, 문제없어요


비가 오다 보니 차가 막혔고 약속시각을 조금 넘겼다. 부랴부랴 달려가 취재 장소에 도착했다. 단층 건물의 간판을 보니, 마치 주인장이 늦은 것에 대해 미안해 하지 마라고 속삭이는 것 같다. 영도 남항동의 '문제없어요'는 입구 간판만 봐도 괜시리 기분 좋아지는 곳이다.

20평 남짓한 이 공간은 둘러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입구 천정엔 꽃이 거꾸로 달려 있고, 한 켠에 세워진 미닫이 문엔 십수 년 전 끝난 강산애 콘서트 포스트가 붙어 있다(주인장이 강산애 팬클럽 활동을 왕성하게 했다고 한다).
전축의 스피커 구멍엔 인형이 들어가 있고, TV 브라운관엔 운치있는 글귀들이 적혀있다. 곳곳에 고서부터 젊은 작가의 소설까지 다양한 장르의 책이 흩어져 있고, 한쪽 벽면에 LP판들이 여기저기 걸려 있다. 또 도대체 홀 중앙엔 놓인 뜬금없는 배트맨 가면은 뭘까.

방명록에는 주인장의 취향이 곳곳에 드러나는 인테리어 때문이지 "너무 재미있어요"라는 글들이 빼곡하다. 캐리커처 그림까지 그리며 유쾌한 감정을 기록한 손님들도 있고, 연애편지 쓰듯 장문의 서정적인 글도 보인다. 그렇다고 실제로 부끄러운 고백이나 말못할 고민은 쓰지 마시라. 주인장이 수시로 방명록 글을 자신의 인스타그램에 올리고 있어 어떤 식으로 공개될 지 모른다.

어느 블로거가 주인장에 대해 '만화 캐릭터 같다'고 평가했는데 진실이었다. 깔끔하게 민 스킨헤드 스타일의 조영현 대표는 음악, 영화, 소설 등의 이야기를 몇 시간이고 말해 줄 수 있을 것 같은 캐릭터이다.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라고 할까. 20년 가까이 디자인 계통에서 일했다고 하는데, 그래서인지 가게의 많은 소품들이 재미있으나 혼란스럽지는 않게 배치된 것 같다.
겨울철 인기메뉴인 제주 감귤차.
그가 타준 감귤차가 몸을 녹여줬다. 제주도에서 직접 공수해오는 귤로 만들었는데, 색도 이쁘고 맛도 좋아 겨울철에 인기 메뉴라고 한다. 평소엔 카카오 계열 음료가 많이 팔린다고 한다. 조 대표는 "지난해 1월에 가게를 열었는데, 좋아하는 것을 공유하는 공간을 만들고 싶었다"고 했다.

'문제없어요'는 한두 달에 한 번씩 작은 콘서트장으로 변신한다. 지금까지만 포크가수의 공연이 4차례, 현악기 중심의 클래식 공연이 5차례 열렸다. 국악 공연도 있었다. 20~30명의 관객이 이곳을 가득 채운다.

이달 22일엔 인디계 스타인 '김므즈'의 첫 부산 콘서트가 준비돼 있다. 관객 바로 앞에서 뮤지션이 연주하고 소통하는 작은 콘서트의 모습을 그려보니 꽤 운치가 있을 것 같다.

조 대표는 "가정집을 개조한 이 공간이 이상하게 소리가 안으로 울리면서 뮤지션도 좋아한다"며 "공연자나 관객 모두 반응이 좋다. 티켓도 금세 매진이다"고 말했다. 굳이 거창한 공간이 아닌 작은 커피숍에서도 예술과 문화로 소통하는 일은 문제없어 보인다.

글·사진=김백상 기자 k103@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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