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피란수도 부산] 14. 언젠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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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타국서 총 들었던 사람들 마음은 무엇이었을까?"

1.

가을 햇볕이 좋은 날이었다. 박이도 씨는 베란다 창문을 열고 밖을 내려다보았다. 23층 아파트 아래로 노랗고 빨간 단풍잎들이 꽃처럼 활짝 피어있었다. 하늘에는 구름 한 점 없고, 적당히 시원한 바람도 불어서 '가을이구나'라는 말이 저절로 나왔다. 비록 세 발 목발에 의지하고 있지만, 아들 내외나 손자 현승의 도움 없이 홀로 설 수 있게 된 것도 감사한 일이었다. 나풀나풀 떨어지는 단풍잎들을 보는 박이도 씨의 얼굴에는 오랜만에 미소가 지어졌다.

정들었던 고향 집을 정리하고 부산 대연동 큰아들네로 이사를 온 것이 석 달 전이다. 한밤중에 소변이 마려워 이부자리에서 일어났다. 30년을 넘게 산 고향 집은 불을 켜지 않아도 어디에 어떤 가구가 배치되어 있고, 어떤 물건이 놓여있는지 훤히 꿰고 있었다. 하지만 그날만은 예외였다. 화장실 입구의 슬리퍼가 예상과 다른 위치에 있었고, 박이도 씨는 그 자리에서 미끄러지고 말았다. 어이쿠! 넘어지면서 알 수 있었다. 이거 사달이 나도 크게 났구나. 그렇게 홀로 끙끙 앓다가 동이 트자마자 옆집 김 씨에게 전화를 했다. 응급차를 타고 병원에 가니 엉덩이뼈가 부서졌다는 진단이 나왔다. 그 길로 입원을 해서 수술을 했다. 퇴원수속을 하면서 의사는 물리치료와 운동을 꾸준히 하지 않으면, 걷기 힘들 수도 있다는 말을 했다. 박이도 씨는 그 말을 듣고 피식 웃었다. 총알이 비처럼 쏟아지던 월남전에서도 무사히 돌아온 자신이었다. 용맹하기로는 대한민국 군인 중에서 최고라는 청룡부대 해군 출신이었다. 그런 자신이 침대에 누워서 꼼짝도 못 한다는 건 말도 되지 않았다. 의사는 박이도 씨의 나이와 상태를 다시 한 번 힘주어 말했다. 아들 내외가 설득에 설득을 더해서, 박이도 씨는 통원치료를 주기적으로 받을 수 있는 큰아들 집으로 거처를 옮겼다.

저 멀리 초록색 잔디밭과 공원이 보였다. 박이도 씨가 세 발 목발과 현승의 도움으로 일어서게 되었을 때, 처음으로 한 일은 베란다 창가로 가는 것이었다. 침대에 누워서 보이는 풍경이라고는 회색빛의 빌딩과 빽빽하게 자리 잡은 아파트뿐이었다. 그나마 조망이 좋다는 베란다에 서니 공원과 하늘이 보였다. 박이도 씨는 제힘으로 걸을 수 있게 되면, 저 공원에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조금의 땅만 생겨도 건물을 짓는 도시에서, 저곳만은 예외인 듯 푸른빛을 자랑하고 있었다. 도시 사람들의 숨 쉴 곳이 아니겠냐는 생각을 했다.

"어? 저기 우리 집 옆에 있는 건데."

텔레비전을 보고 있던 중학생 현승이 말했다. 한국에 사는 외국인이 고국의 친구 세 명을 초청해서 3박 4일 동안 한국을 여행하는 프로그램이었다. 젊은이들 사이에서 꽤 인기 있는 방송이라고 들었다.

"어디? 어디가 나왔는데?"

주방에서 설거지를 하고 있던 며느리가 고무장갑을 낀 채 뛰어왔다. 브라운관에는 양복을 입은 터키 남자 세 명이 부산행 기차를 타고 있었다. 한국전쟁에 참전했다가 전사한 터키군인을 추모하기 위해서 유엔기념공원을 방문했다. 462명의 터키군이 유엔기념공원에 안장되어 있다는 자막이 흘러나왔다.

"에이, 난 또 어디라고."

며느리가 방송을 보면서 아쉬운 듯 말했다.

"저기 유엔묘지잖아. 대연동, 용호동 완전 노른자 땅에 묘지가 딱 자리 잡고 있잖아요. 저길 개발해서 아파트를 짓거나, 대형마트나 백화점이 들어오면 이 동네 경제도 더 좋아지고, 지금보다 집값도 더 뛸 건데. 아버님, 저기가 치외법권지역으로 토지권이 유엔에 있대요. 전쟁 이후에 한국 정부가 유엔에 땅을 줘서…. 남 좋은 일 시키고 있는 거지요. 아무것도 못 하고."

"그래서 거기가 어딘데?"

박이도 씨가 묻자 며느리가 베란다로 와서 손가락으로 공원을 가리켰다.

"저기요, 저기. 집에서 바로 보여요."

그러니까 박이도 씨가 공원이라 생각했던 바로 그곳이 유엔묘지 즉, 유엔기념공원이었다. 한국전쟁 중에 전사한 유엔연합군을 안장해 놓은 바로 그곳 말이다. 박이도 씨는 그 말을 듣자마자 가슴이 두근거렸다. 당장이라도 저곳에 가보고 싶었다.

2.

한국전쟁이 발발한 1950년, 박이도 씨는 서울 외곽에 사는 8살 꼬마였다. 서른을 갓 넘긴 아버지는 자고 있던 자식들을 깨워 피난길에 올랐다. 목적지는 청주에 있는 작은아버지 댁이었다. 7살 후남이가 5살 삼도를 업고, 11살 일도가 아버지와 함께 손수레를 밀었다. 어린 이도와 어머니는 봇짐을 머리에 이고, 등에 지었다. 청주까지 도착하기도 전에, 북한군이 먼저 청주에 도착했다. 목적지는 다시 대구의 육촌형님 집으로 바뀌었다. 그러다 다시 부산으로 바뀌었다. 북한군의 총력전에 국군이 맥없이 쓰러지고 있다는 흉흉한 소식이 들렸다. 이대로 한반도가 공산당의 손아귀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냐며 사람들이 맥없이 말했다. 그렇게 살기 위해, 연고 하나 없는 부산까지 흘러들어왔다.

피란민들이 많이 산다는 부산진 근처에 하꼬방을 하나 얻었다. 박이도 씨의 아버지는 이른 새벽부터 부산진으로 나가 일거리를 구했다. 허드렛일도 마다하지 않고, 닥치는 대로 일을 해서 잡곡이라도 얻어야 했다. 그렇게 몸을 사리지 않고 일을 하는 사람은 박이도 씨의 아버지만이 아니었다. 대부분의 피란민이 그렇게 일을 하다 보니, 일자리는 점점 부족해졌다.

어느 날, 아버지가 잡곡도 아닌 쌀을 한 주머니 들고 왔다.

"아니, 이게 웬 쌀이에요?"

어머니가 놀라서 묻자, 아버지는 좋은 일자리를 구했다고 말했다. 어린 박이도와 형제들은 그저 쌀밥을 먹을 수 있다는 것에 감격해서 아버지가 무슨 일을 하는지 궁금치 않았다. 흙과 먼지, 피로 범벅이 된 옷을 입고 들어와도, 일을 열심히 해서 그런 것이라 자연스레 여겼다. 아버지는 이른 새벽에 나가서 밤이슬을 맞으며 돌아왔다. 어떤 날은 알사탕을, 어떤 날을 사과를 들고 왔다. 그리고 술병을 입에서 떼지 못했다.

"그래서 그 일을 계속할 거예요? 그게 어디 사람 할 짓이에요? 상놈이 하는 거지!"

"지금 이 상황에서 상놈, 양반 따질 게 뭐가 있어? 그리고 우리가 언제부터 양반이었다구, 그런 말을 해."

"우리 박 씨 집안이 양반이지, 그럼 상놈이에요! 조상님들이 알아봐요, 남사스러워서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있나!!"

좀처럼 목소리를 높이지 않는 어머니가 아버지를 향해 얼굴을 붉히며 소리쳤다. 아버지는 그런 어머니를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으로 더 큰 소리를 냈다.

그러니까 아버지는 부산진에서 일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새참을 들고 부산진 부두에 간 어머니는 아버지가 우암동 부두에 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감만동, 우암동 부두에는 한국전쟁에 참전한 유엔군의 유해가 배에 실려 들어왔다. 개성, 인천, 대전, 대구, 밀양, 마산 등에 가매장되어 있던 임시묘지의 유해가 부산으로 이장된 것이다. 유엔군의 유해는 곧장 본국으로 가는 배에 실려 송환되기도 했으며, 그렇지 못할 시에는 대연동의 군사묘지에 매장되었다. 박이도 씨 아버지가 하고 있던 일은 바로 우암동 부두에 온 유엔군의 유해를 정리해서 옮기고 매장하는 일이었다.

"전쟁통에 먹고살려면 이 일이라도 해야지, 나라고 시체 만지는 일이 좋은 줄만 알아? 다 자식 생각해서 하는 거지!"

말을 끝낸 아버지가 입안 가득 술을 털어 넣었다. 연거푸 몇 잔을 들이켜더니, 모두가 들을 수 있게 한숨을 쉬었다. 아버지의 한숨 소리에 작고 조그맣던 지붕이 폭삭 내려앉을 것만 같았다. 어린 박이도는 그런 아버지를 아무 말 없이 바라보았다.

"그래도 그분들이 와서 우리를 지켜주니까, 이렇게라도 살고 있는 거다. 저 멀리 미국이랑 터키, 불란서, 도이칠란트에서 코 큰 양반들이 와서 싸워주니까, 공산당한테 안 뺏겼지. 고맙게 여겨야지. 다른 나라 사람을 위해 싸워주는 게 어디 쉬운 일이가."

술에 취한 아버지는 어린 박이도를 의식하면서 주저리주저리 말들을 늘어놓았다.

"내가 그 마음이 고마워서, 잘 묻어주고 있다. 좋은 데 가시라고, 다음 생에는 전쟁 없는 곳에서 태어나서 행복하게 사시라고 말이다. 다른 놈들은 양놈 물건이라고 벨트나 배지, 군화 벗겨서 팔기도 하는데, 나는 그런 것도 안 한다. 좋은 일 하고 돌아가신 분들한테 그러면 죄 받는다."

아버지의 그 말은 어린 박이도에게 깊게 각인되었다. 그래서 한국전쟁이 끝나고 10년 뒤, 베트남 파병 군인을 모집한다는 기사를 보았을 때, 다른 사람들보다 쉽고 빠르게 지원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물론 어렵고 힘든 가정경제에 도움이 되고자 지원을 한 것도 있었다. 하지만 도움을 받은 사람이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위해야 한다는 아버지의 말에 응답한 것도 맞았다. 민간인으로 전쟁을 겪는 것과 군인으로 전쟁을 경험하는 것이 얼마나 다른지, 이제 갓 스무 살을 넘긴 박이도 씨가 알지 못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기도 했다.



3.

박이도 씨가 탄 휠체어는 손자 현승이 밀었다. 유엔기념공원 정문에 다다르자 군복을 입은 군인들이 정자세로 경례를 했다. 박이도 씨는 오른손을 이마에 붙이며 힘차게 경례에 답했다. 정문을 통과하자 푸른 잔디밭이 펼쳐졌다. 현승이 추모관 안으로 휠체어를 밀었다.

한국전쟁 당시 16개 국가에서 전투 지원을, 5개 국가에서 의료지원을 보냈다. 그중 4만 896명의 유엔군 희생자가 발생하였으며, 1951~1954년 사이 이곳에 21개국 1만 1000명의 전사자가 안장되었다고 한다. 이후 벨기에, 콜롬비아, 그리스, 필리핀 등의 나라에서 자국 군인들의 유해를 본국으로 이송했으며, 현재는 11개국 전사자 2297명이 유엔기념공원에 안장되어 있다고 했다.

현승과 박이도 씨는 천천히 추모관과 기념관을 둘러보았다. 몇 날 며칠 배를 타고, 낯설고 먼 타국에 와서, 자신과 이해관계가 없는 누군가를 향해 총을 들었던 사람들의 마음은 어떤 것이었을까. 그들이 지키고 보호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들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박이도 씨는 벽면에 붙은 사진과 커다란 화면에서 재생되고 있는 영상들을 보면서 생각했다. 두 눈이 파란 젊은이와 얼굴이 검은 청년, 곱슬거리는 빨간 머리를 가진 사내들이 총과 대포를 장식품처럼 두고 서 있었다. 자신만만하고 패기 있는 표정과 몸짓으로 말이다. 그들은 자신에게 앞으로 일어날 일들을 얼마나 알고 있었을까? 그렇다면 나는 무슨 생각으로 베트남전에 참여했던 걸까. 그 당시 내가 지키고 싶던 것들은, 과연 그만큼 지켜야 할 가치와 명분이 있었던 것일까.

한국전쟁에 참여한 유엔군의 모습이 각 나라의 언어로 설명되고 있었다. 생소한 이방의 언어를 들으며 박이도 씨는 좀처럼 고민해보지 않던 질문들을 스스로에게 던졌다. 누군가가 물으면 자랑스러운 청룡부대 출신이라고 의기양양하게 말했던 자신이었다. 고엽제도 피했고, 전쟁 후유증도 없었다. 찡-하고 머리가 아프면서 속이 울렁거렸다. 모든 것들이 혼란스러워졌다. 베트남 어딘가에 묻혀 있을 동료들이 떠올랐다. 고국으로 돌아오지 않은, 돌아오지 못한 그들이 그리웠다.

"할아버지, 여기에요. 터키 삼총사가 방문한 곳이요."

현승이 텔레비전에서 봤던 터키군인의 묘 앞으로 휠체어를 밀었다. 사각형의 회색빛 비석에 군인의 나이와 이름이 각인되어 있었다. 현승이 스마트폰을 꺼내 인증샷을 찍었다. SNS에 올리면 '좋아요'를 많이 받을 수 있을 거라며 흥분했다. 그 모습을 보고 있는 박이도 씨는 불현듯 무언가가 울컥, 하고 올라왔다. 눈앞이 뿌옇게 흐려지면서 자꾸만 눈물이 나려고 했다. 흙투성이 옷을 입고 병나발을 불던 아버지가 생각났다. 아버지가 묻은 유해가 어디쯤에 있을까, 아버지는 몇 구의 시신을 수습했을까, 그 당시 아버지에게 물어보지 못한 물음들이 목구멍을 간질였다.

"나이가 들어서 그런가, 왜 이러지."

박이도 씨는 현승에게 들킬까 싶어 괜히 혼잣말을 하며 눈물을 삼켰다.

"할아버지, 이제 전쟁 안 나겠죠?"

사진을 실컷 찍은 현승이 물었다.

"판문점에서 우리 대통령이랑 북한 지도자가 만나서 악수하고 포옹했잖아요. 앞으로 전쟁 안 할 거라고. 그러면 전 군대 안 가도 되는 거 아닐까요? 인터넷에서 보니 통일되면 무조건 군대 안 가도 된대요."

현승이 까만 눈동자를 반짝이며 박이도 씨를 쳐다보았다.

"군대 안 가고 싶나?"

"당연하죠. 제일 좋을 나이에 군대 가서 썩어야 하잖아요. 학교도 못 다니고, 가족도 못 보고, 가고 싶은 사람만 지원해서 개마고원 보초 서면 된대요."

마지막 말을 하면서 현승이 낄낄거리며 웃었다. 금강산, 백두산, 개마고원 보초 서면 재밌지 않겠냐며, 우스갯소리를 했다. 박이도 씨는 물끄러미 손자 현승을 올려다보았다. 언제 이렇게 컸는지, 어깨가 떡 벌어지고 다리도 굵고 튼튼했다. 현승의 바람대로 손자는 전쟁을 겪지 않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기 싫은 일을 억지로 하지 않고, 누군가를 향해 총부리를 들이밀며, 살기 위해서 미친 듯이 뛰고 도망가야 하는 일들을… 손자는 겪지 않았으면.

현승이 박이도 씨가 탄 휠체어를 다시 밀기 시작했다. 게양대 위로 한국전쟁에 참여한 나라들의 국기가 펄럭이고 있었다. 깨끗하게 손질된 초록 잔디가 곱게 깔려 있고, 빨갛고 노란 단풍잎들이 바람에 실려 날아왔다.

'무명용사의 길'

안내판을 따라 길을 들어섰다. 쏴아아아, 11개의 분수대가 시원하게 물줄기를 뽑아 올렸다. 박이도 씨는 그 길을 따라가며 이름 없이 죽어간 군인들의 얼굴을 떠올려보았다. 그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되찾다 보면 정말, 전쟁이 없는 날이 올 것만 같았다. -끝-


오선영


2013년 부산일보 신춘문예 등단. 소설집 <모두의 내력> 발간. 평사리토지문학상 수상.

이번 기획은 부산시 지역신문발전지원사업의 도움을 받아 연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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