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달식의 문화 톺아보기] 42. 공공건축 공모 공정성 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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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너진 신뢰, 시민의 힘으로 재건하자

미국 워싱턴에 있는 베트남전 참전용사 추모 조형물(일명 '추모의 벽') 앞에서 한 남성이 전사한 친구의 이름을 장미꽃으로 가리키고 있다. 당시 이 추모 조형물을 설계한 이는 스무 살을 갓 넘긴, 예일대 건축과 3학년이자 중국계 미국인 여성 마야 린이었다. 연합뉴스

검은 화강석 위에 죽거나 실종된 사람의 이름을 새겨 넣은 기념비. 사람들이 새겨진 이름을 손으로 만지고 탁본하며 함께 기념하는 곳. 현재 미국 워싱턴에서 사람들이 가장 많이 찾는 장소 가운데 하나. 미국의 대표적 건축물이자 조형물….

미국 워싱턴의 내셔널 몰(National Mall)에 있는 베트남 참전용사 추모 조형물(Vietnam Veterans' Memorial)에 대한 얘기다. 흔히 우리는 추모비나 기념비라고 하면 우뚝 솟은 수직의 조형물을 떠올린다. 하지만 이 조형물은 이런 생각을 완전히 깨버린다. 세워져 있지 않고 땅 밑으로 내려가는 형태의 이 조형물은 이전까지 지어진 추모, 또는 승전 기념 건축이나 조형물에서 벗어나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美 베트남 참전용사 기념비
설계 공모 무기명으로 진행
1400점 중 학생 작품 선정

부산 공모 참여 업체 한정적
어떤 회사인지 쉽게 알게 돼
심사위 구성 '부산 外' 할애를

1980년, 미국 재향군인회는 베트남전을 기억하는 기념비를 세우기 위해 설계안을 공모한다. 베트남전이 끝난 지 불과 5년 만이었다. 패배한 전쟁에다 아픈 기억이 생생하기에 비정치적일 것, 죽은 병사들의 이름이 들어갈 것 등 몇 가지 특별한 설계조건이 붙는다. 건축가와 조각가 등으로 구성된 8명의 심사위원회는 1400여 점의 응모작 중 당시 스무 살을 갓 넘긴, 예일대 건축과 3학년이자 중국계 미국인 여성 마야 린의 작품을 당선작으로 선정한다. 인종 문제에서부터 당선자의 경력, 당선안 자체까지. 수많은 반대 여론도 있었다. 하지만 당선자는 의회에 출석해 자기 생각을 얘기하고 설득해, 원안대로 건립할 수 있었다.

당선자 마야 린은 설계 공모 심사가 무기명으로 진행되었기에, 자신이 당선될 수 있었다고 얘기했다. 심사위원들도 그 결과에 놀랐다는 반응을 보였다. 양측의 말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공모 작품을 제대로 평가할 수 있는 심사 환경과 심사위원의 안목이 무엇보다 중요함을 얘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과연 어떤가. 마야 린과 같은 공모 작품을 제대로 평가할 수 있는 심사 환경이 조성돼 있을까? 최근 부산에서 이뤄진 상당수 공공건축의 건축설계 심사를 되돌아보면, 이 물음에 대한 대답은 "아니올시다"이다. 그만큼 건축설계 심사가 갈수록 투명성과 공정성을 잃어가고 있음이다. 이는 비단 부산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올해 부산에서 있었던 몇몇 공공건축물 설계 공모 심사가 그랬고, 최근에는 동래구와 세종시 신청사 설계 공모 논란이 이를 말하고 있다.

설계 공모의 공정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이를 운영하고, 감시·감독할 전문가나 기관이 있어야 한다. 서울은 총괄건축가가 전체 설계공모전을 주관하면서 개선되었다. 또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심사위원이 공모 참가자가 누구인지 정말 몰라야 한다. 베트남 참전용사 추모 조형물 설계 공모 사례에서 보듯, 참가자가 누구인지 알게 되면 공정한 심사는 불가능해진다. 심사위원조차 그 결과에 놀랐다는 것은 되새겨 볼 필요가 있다.

부산은 다른 지역에 비해 주요 설계 공모에 참여하는 업체가 손꼽을 정도로 한정돼 있다. 이런 실정이다 보니 공모안을 확인하는 것만으로도 어떤 업체가 제출한 것인지 쉽게 알 수 있다. 심사위원 수도 마찬가지다. 이에 심사위원 구성을 '부산을 제외한 지역'에 절반가량 할애한다면, 좀 더 신뢰할 수 있는 설계 공모가 될 수도 있을 터이다. 세종시 신청사 논란에서 보듯 발주처나 상급기관의 의지에 따라 설계 공모가 좌우되어서도 안 된다. 권력이나 다른 의지가 개입되어서는 더더욱 곤란하다.

심지어 공모 참여자가 심사 전에 심사위원을 찾아가 자신의 안을 설명한다는 얘기도 들린다. 법적으로 금지돼 있음에도 말이다.

지금 부산은 분명 공공건축 건립의 위기다. 공공건축의 설계 공모는 이미 신뢰를 잃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잃어버린 신뢰를 되찾기 위해서는 발주처와 응모자는 물론이고 심사위원, 시민이 합심해 우리가 살고 있는 부산에 대해 더욱 깊은 애정과 자부심을 가져야 한다. 아울러 부산에 어울리는 좋은 건축물을 만들어나가겠다는 의지도 있어야 한다.

이미 당선작이 예정돼 있다면, 그 도시는 불행하다.

하루빨리 건축의 공정성, 공공성을 확보하자. 건축은 동네를 바꾸고 세상을 바꾸지만, 그 건축을 바꾸는 것은 결국 '시민의 힘'이다. 그 살아 있음이 도시를 바꿀 수 있다.

이런 불합리한 점을 알고도 내버려 둔다면, 이건 필시 우리 사회에 부메랑이 돼 돌아올 것이다. 그 도시에 내일은 없다. -끝- dosol@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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